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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매경포럼] 2002 화장실 혁명, 이제는 멀어진 성취의 기억

  • 노원명 
  • 입력 : 2018.08.29 17:05:15   수정 :2018.08.29 19: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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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초등학교 5년 동안 학교에서 한 번도 대변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금 걱정이 됐다. 그의 학교 화장실을 둘러볼 기회가 두 번 있었는데, 관리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비데는 없었다. "사내 녀석이 이렇게 민감해서야…" 1970년대 초에 태어난 나는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된 가옥에서 자란 세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6·25전쟁 직후 지어진 교사가 리모델링 없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재래식 화장실을 못 견뎌했다. 그중 몇몇은 3년간 한 번도 학교에서 큰일을 보지 않았다. 급하면 학교 앞 상가로 뛰었다. 내 부친 세대가 이걸 봤다면 "군에나 가겠나" 혀를 찼을 것이다. 몇 년 후 입대했을 때 새로 지어진 막사에는 집보다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경험했을 시골 화장실은 비데 세대인 내 아들은커녕 내 세대의 그것과도 거의 유사점이 없다. 차라리 500년 전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런 문화인류사적 전환이 50년 새 이뤄졌다. 3세대 만에 농업사회에서 정보산업사회로 넘어온 한국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의 공중화장실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한다. 화장실 접근성이 우리처럼 좋은 나라가 없다. 웬만한 빌딩 1층 화장실은 개방돼 있다. 새로 들어선 지하철 화장실은 쾌적하다 못해 우아하다. 세미클래식이 나오는 곳도 있고 미술품이 걸린 곳도 있다. 외진 공원 화장실에서도 냄새가 안 난다. 청결로는 유별난 구석이 있는 일본과 자꾸 비교해서 그렇지 그 외 어느 나라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다.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의 경제 발전 경험을 개발도상국에 전파하는 "지식공유 프로그램(KSP)"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현대 경제사의 빛나는 성취를 소개한 여러 보고서를 생산했는데, 그중에는 공중화장실 혁명을 다룬 것도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화장실이 천지개벽한 계기는 2002 한일 월드컵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 일본과 화장실로도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민족 자존심을 자극했다. 월드컵은 지방 여러 도시에서 열렸으므로 서울만 꾸며서 될 일이 아니었다. 1995년 처음 출범한 민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총대를 멨다. "미스터 토일렛(toilet)"으로 불린 심재덕 수원시장 같은 사람이 있었다. 정부·지자체·민간을 아우르는 사단법인 문화시민운동중앙협의회(문민협)가 운동 플랫폼 역할을 했다.

문민협 운동은 두 가지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첫째, 더러운 화장실을 바꾸기 위해 내건 목표가 깨끗한 화장실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장실"이었다. 그래야 충격적 단절이 가능하다고 봤다. 둘째, 변화 주체를 공급자에 두었다. 그전에 이용자를 상대로 한 화장실 문화 캠페인은 모두 실패했다. 문민협 운영국장을 지낸 박민수 씨 회고다. "4000만명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전국 화장실 관리책임자 680명을 집중 교육하는 것은 가능했다. 바닥에 침 뱉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화장실을 만들어 놓으니 이용자가 달라졌다." 사람은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사람을 규정한다. 지금도 자주 눈에 띄는 표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가 이때 나왔다. 화장실만큼이나 화장실 에티켓도 발전했다.

KSP 사이트에는 보고서 수백 편이 있다.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 사회간접자본(SOC), 대중교통, 농지개혁 등 한국의 성공을 대표하는 주제들이다. 굳이 화장실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가장 최근 사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2002년 이후 국민적 성취로 내세울 만한 일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바꾸는 시도가 21세기 들어 몇 번이나 있었나. 개인이나 국가나 성공 경험이 중요한데,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원대한 목표, 핵심 자원 교육, 모범사례 전파, 국민적 에너지 결집이 어우러지는 그 경험 말이다.

요사이 넘쳐 나는 것은 해체담론뿐이다. 지난 정권의 프로젝트는 올스톱됐다.
창조경제는 흔적도 없어졌고, 이미 만들어진 4대강 보도 허문다. 교과서도 허물고, 동시에 건국 역사도 허물어져 내린다. 이렇게 축적 없이 해체만 하다 보면 성공의 기억마저 해체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써내려가야 할 성공 보고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2002 화장실 혁명은 굳이 따지자면 좌파 정부 때 이룬 성취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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