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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과 글씨 이야기] '세한도'에 담긴 세상사

  • 입력 : 2018.02.09 15:53:22   수정 :2018.02.12 09: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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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든든한 가문을 배경으로 꽃길만 걸을 듯했던 김정희는 말로만 듣던 섬 제주도의 작은 마을로 귀양을 갔다. 청년 시절에 세상의 중심 베이징에서 차원이 다른 문명을 보았고, 그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배움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키웠던 김정희였으나 왕조시대 정계의 불안함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시련으로 닥쳤다. 훗날 자신이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고 했던 것처럼 세상은 그를 끈 떨어진 갓처럼 여겼고, 그렇게 야속한 세속의 인심은 제주의 겨울 바람보다 차가웠다. 그 속에서 김정희는 8년 동안, 기약 없는 귀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괴로운 나날 속에서 `세한도`가 탄생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1844년)는 중국에 오가며 어렵게 책을 구하여 제주까지 보내준 통역관 이상적(李尙迪)의 호의에 김정희가 보답으로 준 그림이다. 그때 느낀 고마움을 김정희는 `세한도`의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 않았고 곤경에 처한 뒤에 더 소홀해지지 않았다." 화려한 꾸밈 없이 적었으나 이 문장에서 우리는 세상 무엇보다 듬직하게 느꼈던, `변함없는 동지애에 대한 찬양`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무언가를 찬양하는 그림은 대상을 정성껏 묘사하기가 상식이지만 이 그림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뻣뻣한 붓에 빡빡한 먹을 묻혀 세세함은 포기한 듯이 문질러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휑한 배경에 제대로 그려진 형상이라고는 나무 몇 그루가 우선 눈에 띄지만 그마저도 무슨 나무를 그렸는지 확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에 놓인 한 채 집은 마치 골판지로 만든, 어설픈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이렇게 세련되지 못한 형상들로 어떻게 변함없는 동지애를 `찬양`할 수 있을까?

사물을 그린 형상은 우선 그 대상과 닮아야 한다는 것이 그림의 철칙이다. 따라서 닮게 그리는 기교에 따라 그림의 성패와 화가의 능력 평가가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세한도`는 형상을 대상과 닮게 그려내는 기교가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이상적의 우정을 높이고 자신의 고마움을 오롯이 담아내려면 기교가 충분히 발휘된 그림이어야 상식에 맞겠지만 `세한도`의 형상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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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정희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옛사람이 지향했던, 고양된 정신과 그것의 표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그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이 기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환상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불꽃놀이는 찰나의 순간에 스쳐가는 환영(幻影)이지만, 고양된 정신은 자아가 평생 품어, 오래 묵혀야 할 가치로서, 그림과 글씨와 같은 예(藝)에 반드시 담아야 할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의 아름다움은 느리고 서툴러 보이는 `졸박함`에 오롯이 담긴다고 여겼다.

기교는 갖가지 외부의 형태와 색으로 화려하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졸박함은 화려함의 그늘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다.
`세한도`는 귀양살이의 설움을 맛본 김정희가 이상적이 보여준 의리에서 자신을 유지할 `긍지`를 포착하여 형상으로 만들되, 그 고양된 긍지에 합당한 아름다움으로서 `졸박`을 선택한 작품이다.

고양된 정신을 이미지로 번역하되 졸박함을 아름다움의 근간으로 삼았는데, 이들 요소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기에 졸박하나 우스꽝스럽지 않고 정신은 고양되었으나 들뜨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와닿음으로써 보편의 가치를 드러내는 데 이르렀다.

우리가 저마다의 긍지를 높이고 살아가기가 어려워 보이는 시절이다. 세태에 맞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다 독한 설움에 처한 이들의 사연들을 보고 들으면 그렇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배객 김정희의 정신을 고양시켰던, 상황에 따라 변치 않는 봄기운, 즉 연대감과 동지애가 아닐까?

[유승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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