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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매경포럼] 정부가 못하면 기업이 한다

  • 장박원 
  • 입력 : 2018.02.05 17:11:36   수정 :2018.02.05 21: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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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수 시절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전직 교사였던 그가 병원비를 내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공무원 생활을 했던 사람이 잠시 병원 신세를 졌다는 이유만으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지만 미국 헬스케어(의료서비스) 시스템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작은 위급 상황도 버틸 여유가 없다." 지난달 29일자 허핑턴포스트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월마트와 타이슨푸드 두 곳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한 노동자가 병에 걸리자마자 감당하기 힘든 병원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빈곤층으로 전락했다는 사연을 소개하며 미국 헬스케어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금융정보 업체인 뱅크레이트 보고서를 인용해 예상하지 못한 병에 걸릴 것에 대비해 1000달러를 저축해둔 미국인이 고작 39%에 불과하다는 수치도 제시했다. 미국 정부 통계를 근거로 2016년 무려 1050만명이 의료비 때문에 빈곤층으로 떨어졌고, 인구 중 44%가 갑자기 아팠을 때 400달러 이상 쓰기 힘들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지난해 보고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미국 사회의 고질병이 된 헬스케어 시스템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다시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뾰족한 해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은 해마다 1인당 1만달러, 총 3조4000억달러를 의료비로 지출한다. 국내 생산 중 약 18%로 영국과 일본, 독일의 2배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비가 너무 비싸 수많은 서민들은 헬스케어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다. 의료서비스가 엉망인 이유는 시장을 대형 병원과 제약회사 등 공급자가 지배하고 있는 구조 탓이 크다고 FT는 진단했다.

미국 정부가 헬스케어 문제점을 고치지 못하자 급기야 기업인들이 해결사로 나섰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와 버크셔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이 그들이다. 이들은 저렴한 비용에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비영리기업을 설립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3개 기업에 속한 직원 100만여 명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실시하고, 자리가 잡히면 일반인으로 범위를 확대하는 방식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에서는 성공 확률을 높게 보고 있다. 아마존은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원격진료와 온라인 제약 유통시장에 강점이 있고, 버핏이 투자한 회사 중에도 의료사업을 하는 곳이 있다. JP모건은 보험 등 금융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니 환상의 팀이 될 잠재력이 충분하다. 세 거물이 의기투합해 높은 품질의 의료서비스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하는 비영리법인을 설립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존 헬스케어 기업 주가가 폭락한 것은 이들의 위력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기업이 수행하는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회적 기업 지원 사업도 그중 하나다. SK는 2015년부터 사회적 기업을 모집해 성과가 좋은 곳을 선정하는 `사회성과인센티브 어워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일방적 지원만으로는 경쟁력 있는 사회적 기업을 육성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참여 기업이 매년 2배 이상 늘어날 만큼 반응이 좋다. 기업이 추구하는 효율성을 사회적 가치와 접목한 게 주효했던 것이다.

이렇듯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부가 생각하는 범위를 넘어선다. 특히 성장을 이끄는 노하우나 저력은 정부나 공공기관보다 민간 기업이 몇 수 위일 가능성이 높다.
기업은 성장이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기 때문이다. "속도와 혁신은 기업 몫이고 정부는 시장의 기득권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지난달 24일 열린 `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 업무보고에서 한 기업인이 한 말이다. 미국 헬스케어 시장의 혁신을 준비하는 베이조스와 버핏, 다이먼은 조만간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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