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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과 글씨 이야기] 조선실학자 이익에게 배운 통찰의 힘

  • 입력 : 2018.11.24 0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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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라는 말은 많이 쓰이지만 그 뜻이 여려 겹이라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다. 동양의 붓글씨에서는 반듯한 글씨를 가리키는 해서, 획을 생략하여 효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초서 등 대여섯 종류의 글씨를 말하거나, 글씨에 뛰어났던 인물의 개성이 담긴 글씨를 일컬어 서체라고 한다. 글씨 종류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전서(篆書)`라고 부르는 서체다. 이 서체는 한자를 일상으로 쓰던 시대에도 매우 읽기 어려운 글자로 여겨져서 특별한 경우에만 쓰였고, 한편으로 민간에서는 이 서체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믿음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 역사가로,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17세기의 대학자 허목(許穆·1596~1682)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하다가 삼척 지방에 전해오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허목이 부사로 부임했던 삼척에 응벽헌(凝碧軒)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귀신이 살면서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로부터 고충을 들은 부사 허목이 칡뿌리에 먹을 묻혀 커다란 전서 글씨를 써서 현판으로 걸었더니 귀신들이 달아났고, 이를 고마워하는 고을 주민들의 칭송이 안정복이 살던 시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고 했다.

칡뿌리에 먹을 묻혀 쓴 커다란 전서는 과연 어떤 글씨였기에 귀신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지금은 그 현판에 쓴 글씨를 볼 수 없으나 허목의 다른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어 귀신을 물리쳤다는 그의 글씨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사진으로 소개하는,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세운 `동해비`의 글씨가 그 가운데 대표작이다.

동해의 바닷물이 종종 넘쳐 고을이 물에 잠기기도 하는 등 피해가 잦다는 삼척 주민들 민원을 들은 허목은 바다를 달래는 시를 지었고, 그것을 손수 써서 고을 앞바다의 작은 섬 만리도에 세웠다. 과연 그 뒤로 바다가 말썽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앞에 언급한 응벽헌의 귀신을 물리친, 현판에 칡뿌리로 쓴 글씨 이야기는 이 `동해비`의 속편일 수 있겠다.

허목이 쓴 전서체의 저 글씨들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전설의 시대,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글씨에 바탕을 두었다고 했으나 그 시절 글씨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허목이 비록 평생 옛 문물을 연구하여 터득한 바로써 구현한 서체이기는 하나 일반 사람들에게 저 글씨는 귀신을 쫓을 만한 공력을 지닌 `부적`으로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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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흔히 허목의 글씨를 `영험을 지닌 매체`로 받아들였지만 실학자 이익(李瀷·1681~1763)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성호사설`에서 허목이 `동해비`에 새기게 했던 시 `동해송`을 소개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드러낸 서문을 썼다.

"미수 허목의 전서는 청동기에 있는 글씨들에 가깝다. 그러나 세상에 그 진위를 알아볼 안목을 갖춘 사람이 없으니 그가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해도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귀신에 홀렸는데 동해비의 시를 곁에 두었더니 귀신이 가까이 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익은 귀신을 쫓은 것은 `글자의 모양, 서체`가 아니라 `시의 내용, 뜻`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글씨가 옳은지 그른지 세상이 알 수 없으니 그 서체에 귀신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며, `시나 문장`에 그런 힘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사리를 따져서 이치를 궁구하는 데 학문의 근간을 두었던 실학자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 속도와 효율의 경쟁 속에 자칫하면 잃게 되는 것이 `이치를 따르는 지혜`다. 규모가 작든 크든 공동체의 어른으로 작용할 이들이 꼭 갖춰야 할 것이 저런 지혜다. 대중이 눈앞의 변환에 눈길을 빼앗기더라도 리더는 `통찰`로써 그 본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유승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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