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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과 글씨 이야기] '문득' 속에 깃든 삶의 이치

  • 입력 : 2018.10.27 0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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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락대는 소리가 달라!"

며칠 전 등굣길 어린이가 밤새 떨어진 느티나무 낙엽을 밟으며 하는 말을 들었다. 아이는 연신 여기저기 뒹구는 잎사귀를 밟아보느라 학교는 나중 일이었다. 천진함이 저런 것이라, 엷은 웃음이 문득 일었다.

`문득`은 `갑자기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르는 모양`이거나 `행동이 갑자기 이뤄지는 모양`을 일컫는다고 사전에서 정의한다.
문득 들은 그 어린이의 말에 아이의 `천진함`이 담뿍 담겨 있었고, 어쩌면 그 `갑작스러움`에서 들은 이가 환하게 웃음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옛사람들도 이런 `문득의 우연`과 마주치곤 했을 텐데, 그것을 이미지로 만들어낸 작품은 없을까? 당연히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겸재 정선(1776~1859)이 그린 부채 그림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東籬採菊)`는 고운 색채가 남다르게 예쁜, 가을을 배경으로 한 그림의 좋은 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중국 동진(東晉) 말엽에 살았던 위대한 시인 도잠(陶潛)의 시를 이미지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 문득 남산을 바라보네."

이는 도잠이 `음주(飮酒)`라는 제목으로 스무 수를 묶은 연작시 가운데 다섯째 시에 나오는 구절인데, 동양 문사들은 물론 서화 예술가들도 가장 사랑한 작품이다. 울타리 아래 핀 국화들, 그리고 무릎 아래 술잔과 꺾은 국화를 아무렇게나 둔 채 `문득`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남산을 바라보는 사람, 도잠 본인도 그 정황을 `말로 표현해보려 했으나 말조차 잊었다`고 했다. 문득 느낀, 마치 선사(禪師)들의 갑작스러운 깨달음 같은 삶의 이치를 포착한 시이기에 수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작품처럼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어했나 보다.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도 이 구절을 두고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경물과 시인의 뜻이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평했고, 조선 정조 때 강원도에서 선발돼 서울로 불려온 선비 최창적(崔昌迪)은 임금이 태평성세와 시의 관계를 묻자 `억지로 이루려는 욕심을 버림`이 우선이므로 도잠이 지은 `음주`의 이 구절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답을 하여 왕에게 수긍과 칭찬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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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이 그림은 표현할 말조차 잊어버린 시인의 `문득의 순간`을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인물이 고개를 돌린 모습, 술잔을 나뒹굴게 둔 것, 굳이 자세한 모양을 그리지 않은 국화들부터 산자락만 보이도록 그린 남산까지 모든 요소가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문득의 자연스러움`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저 남산을 향해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인물을 묘사했다면, 그리고 술잔도 인물 곁에 얌전히 놓았더라면, 남산이 눈앞에 그득히 드러났다면 저 `문득의 서정`은 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시를 잘 아는 화가 정선의 면모까지 포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숙종 시대 비평으로 유명했던 이하곤이 정선과 알고 지내기 전 일면식도 없던 그에 대해 "아마 시에도 뛰어난 사람일 것 같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 이하곤이 어떤 그림을 보고 했을 말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억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마음은 일을 이루기보다 그르치는 데로 사태를 이끈다. 어느 세상이나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 잠시도 멈출 수 없으므로 무엇을 이뤄내려는 마음 또한 아예 부정할 것은 전혀 아니다. 조선시대든 동진시대든 세상의 그런 요구가 없던 때가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국가를 운영하던 정조가 자신이 만들기 원하는 태평성세를 시와 연관 지어 물음을 던지고, 이에 `문득`이 핵심인 저 구절로 그에 답한 대화에서, 그리고 정선의 저 그림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문득의 우연`에 내포된, 삶의 큰 이치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유승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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