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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매경데스크] 수행평가의 20년 딜레마

  • 황인혁 
  • 입력 : 2018.10.08 00:01:02   수정 :2018.10.08 10: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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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무인도에 표류됐다. 구조되기 전까지 생존에 필요한 몇 가지를 제시하시오.`

뉴욕특파원으로 일할 때다. 1년 전쯤 중학교 딸이 이런 수행평가 과제를 받아왔다. 딸은 학급 친구 2명과 수차례 모임을 갖더니 비바람을 피할 가옥과 정수기 모형 등을 만들기로 했다.
나무, 알루미늄 코일 등으로 모형 집을 만들고 자기 딴엔 정성들여 색칠한 이 과제물을 한 학기가 끝날 무렵 `수행평가 발표회`에 출품했다. 이날은 학부모들도 초청돼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졌다. 모든 학생 참가자들은 목청을 높여 자신들의 과제물을 발표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행평가 제도는 1980년대 미국 교육계에 본격적으로 접목됐고, 1999년 한국에서 첫 시행됐다. 수행평가는 학습의 `과정과 결과`를 함께 중시한다. 여러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운다는 게 핵심 기대 효과다. 미국 학교 교사들은 "수행평가 때 부모가 도와주면 안된다"고 늘 강조한다. 그날 발표회 현장을 둘러본 기자는 모든 출품작이 중학생들 스스로 완성한 것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반면 한국에 도입된 지 약 20년이 지난 수행평가는 오늘날에도 `엄마평가`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결과만 있고 과정은 없다면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것이다. 이는 한국적 과잉경쟁과 교육열이 낳은 낯 뜨거운 부작용이기도 하지만 수행평가가 너무 많아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과하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딸이 다니던 미국 중학교에선 과목당 한 학기에 1개, 많아야 2개 정도 수행평가가 부여됐다. 한국의 중학교에선 과목당 3~5개 과제가 배정되는 경우를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애와 엄마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마감에 쫓겨 제출하는 과제물에 아이들의 창의력을 담을 공간은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재정적 여력이 있는 일부 부모들은 학원과 알바생을 동원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되풀이된다. 수행평가가 창의력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려면 과중한 평가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최근 본지가 `쏟아지는 수행평가…악소리나는 중고생·학부모`라는 기사를 내보냈더니 독자들의 반응이 꽤나 뜨겁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학부모 온라인카페에 관련 기사가 공유됐다. 청와대에는 중·고교 수행평가를 간소화해 달라는 청원이 줄을 잇고 있다.

"전 초등맘인데요. 알바 써서 애 수행해준다는 얘길 듣고 경악했어요." "도와주기 힘든 워킹맘은 어떡하나요. 너무 속상해요." "우리 중학생 애는 영어 한 과목만 해도 팀별 과제 2개에 개인 과제가 3개예요. 너무 부담이 커요."

단순 암기식 수업 대신 토론과 발표, 다양한 체험을 유도하는 수행평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학부모는 별로 없을 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녀의 과제가 부모의 과제로 전락하고 부모의 수고를 더는 학원과 알바까지 성행한다면 그건 이미 도를 넘어선 것이다. 특히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이 수행평가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와 문제해결의 기회조차 박탈한다면 이건 후대에 대한 과오다.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그리고 이를 극복할 뒷심이 없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무슨 도전의식을 발휘할 수 있을까.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 각종 시험 스트레스 속에 아이들은 `야행성 입시기계`로 전락하고 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명문 사립대 총장은 한 입학생이 들려준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 학생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매일 밤 늦게까지 학원에 다녀 햇볕을 제대로 쬔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 대학에 들어온 뒤에도 주변이 밝은 대낮에는 왠지 불안하고 컴컴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어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자연과 함께 호연지기를 키워야 할 한국의 아이들이 이렇게 커나간다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야당의 거센 반발 속에 지난주 취임했다. 첫 여성 부총리가 된 그는 첫 일성으로 `사람 중심 교육`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일선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충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눈여겨볼 일이다. 수행평가 노이로제가 학생과 엄마의 일상을 지배해서야 되겠는가.

[황인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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