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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법 이야기] 언어의 한계가 만들어낸 '괴물'

  • 입력 : 2018.10.06 0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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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에 물이 얼마나 차 있는지 측정을 해 보니 딱 절반 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과학자는 확인 결과를 측정한 대로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생활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는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표현이 여러 가지일 수 있겠다. 물이 아쉽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할 것이다.
아직도 물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보고한다. 같은 현상 앞에서도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소한 뉘앙스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이 우리네 일상 언어생활일 게다. 문제는 이 말을 전해 듣는 사람에게는 이해의 차이가 더 크게 증폭된다는 데 있다. 전달받는 사람은 컵 상황을 직접 본 게 아니다. 오로지 전달자의 보고에 의존해 컵에 물이 어느 정도 들었는지 이해한다. 예컨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아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물이 별로 남지 않은 물컵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결국 전달자 입장에 따른 뉘앙스 때문에 물컵 속 물이 충분한지 아닌지에 관해 상반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지금 눈에 보이는 목제 책상 색깔이 무엇인지 각자 적어보게 한다. 한 학생은 이모저모 살피다가 갈색이라고 적었다. 다른 학생은 연갈색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학생은 베이지색이라 답하기도 한다. 아이보리, 살색, 황토색, 주황색, 심지어는 그냥 나무색이라는 답도 나온다. 학생들 저마다 색 인식과 표현이 천차만별임을 알고 나서는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색 표현 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보다 더 근본적 문제가 있다. 기실 현실의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색이 존재한다. 이들 색감의 미묘한 차이를 색채 기호가 아닌 일상 언어의 표현으로는 구분해 다 담아둘 수 없다. 이 한계 때문에 우리는 미묘한 차이가 나는 색에 걸맞은 단어를 골라 표현하는 데 애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과제가 또 남아 있다. 학생 자신이 인식한 책상 색깔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한다. 이어서 그로 하여금 말만 듣고 색깔을 고르게 한다. 이런 1차 구전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채로운 여러 책상 색깔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실제 책상 색과는 다른 여러 색깔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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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고 체험한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다시 타인으로 하여금 들은 대로 재현해 보게 하는 과정은 연구 대상이다. 여기에는 녹록지 않은,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인지적 위험요인이 개입한다고 한다. 특히 그 전달, 표현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정확한 전달을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최초로 인식된 감각적 디테일이 우리 언어생활의 한계 때문에 모두 날아가 버린 데서 연유한다.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실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심지어 전달자의 입장에 따른 뉘앙스까지 가세하면서 정말이지 허깨비 같은 괴물이 만들어져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

앞서 물컵의 사례를 보자. 전달받은 사람은 물의 보충 여부를 정하는 정책결정자다. 또는 물컵 속에 치사량에 해당할 정도로 충분한 독극물이 들어 있었는지에 따라 살인 여부를 판정하는 재판관이라고 하자. 전달받은 말의 뉘앙스 때문에 물 보충 정책에서 다른 판단을 한다거나, 사건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전달자의 불순한 의도와 말 때문에 살인죄 성립 여부에 대해 상반된 판단을 내린다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목격자가 전해준 범인의 옷 색깔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잡혀와 관재를 치른다면 이 또한 문제다.

법 생활 또한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 규범 판단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말이 갖는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말이 화근이 되어 엉뚱한 그림이 그려지는 일이 왕왕 있다. 한글날을 앞둔 이 주말, 법 실무 영역에서 한글로 된 말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조심스러운 소회를 가져본다.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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