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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파이터의 눈물

  • 입력 : 2018.09.08 00:06:01   수정 :2018.09.08 17: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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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의 빨간 넥타이에 시선이 멈췄는지 모르겠다. 관중의 함성을 빨아들이는 사각 링 위의 그는 입고 있는 양복이 영 어색한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15년 장충체육관. 이왕표의 모습이다. 절치부심하며 별렀던 은퇴 경기를 건강 문제로 취소하고 현역 마지막 인사로 마감한 자리. 뛰고자 했으나 뛸 수 없었던 61세 프로레슬러의 목에 감겨 있던 빨간색 넥타이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30여 년 전엔 펄펄 날아다니던 그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브라운관 앞에 둥그렇게 모인 마을 사람들은 상대를 휘젓는 그의 현란한 기술에 탄성을 내지르고 그가 링 모서리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려 하면 마지막 `날아차기`의 카타르시스를 예감하며 숨을 죽였다. 그래도 거듭되는 공격과 되받아치기. 결국 뻗어버린 선수가 일본 선수라면? 동네는 잔칫집이 됐다. 번쩍 들어 올려진 그의 두 손은 외롭지 않았다. 우리들의 두 팔도 함께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본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역도산, 김일의 계보를 잇는 이왕표로 인해 암울했던 시기, 잠시나마 시름을 덜었다.

이왕표는 한국 프로레슬링 역사를 다시 쓴 파이터다. 그의 개인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도자가 된 이후 그의 매일의 삶 또한 바닥에 쓰러진 한국 레슬링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혹독한 의무의 연장선에 있었던 것 같다.

"프로레슬링은 모든 게 쇼"라는 폭탄선언이 있었다. 꽤 오래전 일이다. 그 이후로 한국 프로레슬링에 봄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려한 조명에 탄탄한 구성으로 마치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미국 격투기가 일요일 아침마다 국내 마니아층을 깨웠다. 우리 경기와 비교하면 흥행 요소 격차가 날 수밖에 없었다. 높아진 관객들 눈높이에 관중석 빈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전문가들은 프로레슬러 이름 10명 대기가 벅찬 상황이 됐다. `한국 레슬링의 부활`이라는 숙제는 전장 맨 앞에 서 있는 장수에게 숙명처럼 부여된다. 이미 50세를 넘겼다 하더라도 말이다.

노장 파이터, 이왕표 선수 본인이 직접 뛰기 시작했다. 정상적이라면 후배들 경기를 편안하게 관람할 나이에 54세 `원로`가 스무 살 어린 `야수` 밥 샙과의 경기를 성사시켰다. 영웅 김일의 후계자이자 챔피언 타이틀 7개를 보유했던 역전 노장이 세계 정상급의 혈기 방자한 자식뻘 선수와 맞붙은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흥행 돌풍이 예고됐다. 격투기라는 퓨전이 가미됐지만 역전과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진짜배기 레슬링 아닌가.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레슬링계에) 자극이 필요했죠. 제가 밥 샙 경기를 모니터링해 보니까 승산이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레슬링 말고 그의 격투기로 붙자고 했지요. 그리고 이겼는데…제 모습은 전성기 같지 않아도 결국엔 이겼는데, 밥 샙이 일부러 져준 거 아니었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노력과 열정을…말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100㎏ 헤비급 챔피언을 무너뜨린 건 링 위의 적수가 아니라 작은 암 덩어리였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평생의 업이었던 챔피언은 암에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유기농 작물을 키우기 시작했고 고강도 체력훈련으로 복귀하고자 했었다. 그렇게 2015년 은퇴 경기를 추진했던 그였다.
`이제 완쾌되신 건가요`라는 난감한 질문에 흔쾌히 답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천생 레슬러임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인생이란 누구나 잠시 머물다 떠나는 법. 끝없이 머무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링 위에 있을 것만 같았던 그의 부고는 얼얼하게 다가온다. 스승 김일이 살아 있었다면 은퇴는 안 했을 것이라고 송구해하던 이왕표 선수. 사각의 치열한 분투를 뒤로하고 `고생했다`는 스승의 격려를 받으며 모처럼 숨을 고르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한 시대가 또 저물어간다. 향년 64세. 영원한 챔피언이었던 그의 명복을 빈다.

[김은혜 MBN 앵커·특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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