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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과 글씨 이야기] 포도 그림과 예술시장

  • 입력 : 2018.09.01 0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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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순으로 접어들었지만 음력 7월은 가을의 첫 달이다. 추석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거둘 수 있는 과실이라면 포도가 먼저다. 까맣고 탱글탱글한 포도알이 그 무게만큼 덩굴 아래로 늘어져 있어, 키가 닿는 만큼 손을 뻗어 따려다 손아귀 힘을 조절하지 못해 자칫 알맹이가 터지면 얼굴에 그 과즙을 끼얹고 깔깔거린 옛 기억의 흐뭇함도 그 포도송이를 닮았다. 그 풍성함이 길상(吉相)의 상징이 돼 포도는 동양화에서 사랑받는 소재가 됐다.
예부터 포도를 소재로 한 그림은 먹으로 그린 수묵화가 대부분이다. 갈아놓은 먹의 만변하는 색은 덩굴 아래 포도알이 싱그러움을 터뜨리는 모습을 그려내기에 알맞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싱그럽고 풍성한 포도를 그리려면 세 가지 요소를 잘 처리해야 한다. 첫째는 포도알의 탱글거림이요, 둘째는 그 넓적한 잎사귀의 싱그러움이며, 셋째는 덩굴의 구불거림이다. 이들을 모두 장악한, 좋은 포도 그림에서는 먹색의 윤택함은 물론이며 짙고 옅음의 조화와 붓의 속도감과 경쾌한 리듬을 읽을 수 있다.

사진은 그런 조선의 포도 그림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있는, 조선 숙종 시절에 활동했던 홍수주(洪受疇·1642~1702)의 그림이다.

그의 딸이 어릴 때, 이웃집 아이의 비단치마를 빌려 입고 잔칫집에 간 적이 있었다. 여느 아이처럼 잔치의 흥에 들떴던지 그의 딸도 잔치판 사이에서 뛰어놀다 상에 엎어졌고, 그만 간장이 튀는 바람에 입고 있던 비단치마에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눈치가 또래 사내아이들보다 훨씬 빠른 딸들이 그렇듯이, 속이 상한 그의 딸은 집으로 돌아와 문까지 걸어 잠그고 걱정만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아버지 홍수주가 딸을 달래며 방법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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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려무나. 내게 맡기고 밥이나 먹으렴!" 그렇게 딸을 안심시킨 아버지 홍수주는 간장으로 얼룩진 그 비단치마를 펼쳐놓고 포도 그림으로 여섯 폭 자락을 채웠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남긴 이는 그 그림을 이렇게 묘사했다.

"싱그러움이 뚝뚝 듣는 듯하여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작가`는 이 멋진 그림을 베이징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비싼 값에 판 덕분에 좋은 비단을 여러 필 살 수 있었다. 얼룩진 원래 치마값을 갚고도 훨씬 많은 `이문`을 챙긴 `작가`의 딸은 야무진 사업계획까지 세워 아버지에게 제안했다.

"아버지, 이게 좋은 장사인 것 같아요. 우리 한번 더 해 봐요!" 이 말을 들은 사대부인 아버지는 웃으면서 귀여운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생각 같다만, 이런 일을 일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단다."

베이징의 예술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을 그린 작가는 사대부였고, 그의 딸은 어린 사업가였다. 딸은 이미 `무역의 방법`을 깨달았으나 아버지는 글 읽는 선비의 도리가 우선이었다. 숙종 시대라면 청나라와 교역을 재개했기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해 부를 이룬 사람들이 늘어가던 시절이었지만 사업으로 치부한다는 것을 낮춰 본 선비 예술가는 자신의 재주를 그저 여기(餘技)로나 여겼을 뿐이었다.

또 그 멋진 포도 그림을 굳이 베이징까지 가져다 팔았어야 했음은 조선의 그림시장에서 그런 거래가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큰 시장에 가야 큰 장사를 하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인 모양이나, 그 이면에 조선의 시장 규모가 상대적으로 왜소했음을 시사하기도 해 쓴 입맛만 다시게 한다.

싱그러움은 먹을 잘 다뤄야 얻을 수 있고, 흘러넘치는 생기는 활달한 붓질에서 느낄 수 있다. 조선의 그림은 그런 점으로 외국에서는 상품성을 인정받았으나, 정작 국내 시장은 그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예술 시장이 크지 않으면 대중은 제대로 된 문화를 누릴 수 없다. 현재 한국 예술 시장은 조선의 그 시절과 과연 다른가.

[유승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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