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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과 글씨 이야기] 나를 알아봐주는 이, 그가 곧 스승이다

  • 입력 : 2018.05.11 15:55:01   수정 :2018.05.11 16: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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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4대 국왕 선조 이연(1552~1608)은 왕위에 오르자 사림을 등용하며 정계를 개편해 자신의 체제를 구축했다. 그 과정에 문화 분야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이끌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글씨체를 일신한 과업이다.

그는 외교문서 등에 필요한 문장을 지었던 승문원에 글씨에 재주가 있는 인재들을 모아 직책을 주었는데 이것이 사자관(寫字官)이다. 밤중에 등불을 끈 채 떡을 가지런하게 썰었던 어머니의 전설로도 유명한 석봉 한호(韓濩)가 바로 그 사자관 제도가 배출한 명필 중의 명필이다.
과거 한자 문화권이었던 동아시아에서는 글씨에 인격과 품성이 반영된다고 여겼고, 그 인격과 품성의 표상으로 동진시대 왕희지를 비롯한 인물들을 꼽아 그 글씨들을 추종했다. 우리나라에 한정한다면 고려시대 금석문에는 당나라 구양순, 조선 전기 글씨에는 원나라 조맹부의 글씨체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실이 그 사례다.

조선 선조 시대부터는 시대를 대표하는 글씨체가 바뀌었다.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는 서예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씨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여쁨`만 남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 글씨체를 찾았던 조선의 선조에게는 불만스러운 글씨였다. 그 선조가 찾은 새로운 글씨체가 바로 한호의 석봉체였다.

한호를 발탁한 선조는 외교문서 등을 쓰는 일은 물론이요, 출판을 위한 글씨도 쓰게 하는 등 자신의 문화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바꾸어 보면, 그가 그렇게 글씨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1583년 선조는 초급 수준에서 한자를 익히고 글씨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데 요긴했던 천자문(千字文)을 한호에게 쓰게 하고, 이를 출판했다. 사진이 바로 그 천자문으로, 흔히 `석봉천자문`이라고 부른다. 천자문 판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석봉천자문이 가장 널리 유포됐으며, 조선 숙종은 스스로 서문을 써서 석봉천자문을 다시 간행하기도 했다. 관에서 공용으로 간행한 것들과 따로 개인이 목판에 새겨 간행하기도 할 만큼 국내에 두루 퍼지고 사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오키나와 등 외국에도 전해져 그 나라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사진의 천자문은 그렇게 일본으로 전해진, 1583년 간행된 석봉천자문의 원본 가운데 하나로 현재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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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천자문에서 볼 수 있는 한호의 글씨는 반듯하고 기세가 아주 뛰어난 점이 특징이다. 획의 굵기가 적절하여 나약하지 않고, 펼쳐진 폭도 넉넉하여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처음 글씨를 배우는 이들이 따라 쓰며 익히기에 적당하도록 간명한 외양은 소박하지만 나라의 표준서체가 지향할 `단정함`을 잘 보여주는 글씨다.

한호는 일생 수많은 교서를 썼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승전을 기리는 기념비의 글씨를 비롯하여 여러 명망가의 비석에 쓰인 글씨들을 쓰고 또 썼지만, 그를 상징하는 글씨는 역시 석봉천자문의 반듯한 글씨체, 해서(楷書)라고 할 수 있다.

1599년 한호가 57세였던 해에 선조는 긴 세월 동안 글씨로 나라에 봉사한 이 신하에게 휴가를 겸하여 지방의 한직으로 내보냈는데, 가평의 군수로 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임지로 떠나는 한호에게 선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전별했다.

"굳이 너의 글씨를 얻으려 하는 이라면 그는 너의 글씨를 후세에 전하려는 이이니, 싫증을 느낄 때면 억지로 하지 말되, 게으르지도 서두르지도 말라."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북돋아주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달라지게 하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스승이란 그런 분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스승의 은혜를 기리고 되새기는 계절, 남에게 스승이 될 만한 이는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절이다.

[유승민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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