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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떠나야 할 때와 남아야 할 때

  • 입력 : 2018.04.11 17:20:16   수정 :2018.04.11 17: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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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자의든 타의든 거의 평생을 몸 바쳤던 직장을 떠나는 주변 사람이 많아졌다. 나이가 정년에 가까운 사람도 있었고 아직 갈 길이 먼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만의 전문성으로 스스로 속한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라는 것이었다.

기업이라는 하나의 조직에서 특정한 나이가 돼 퇴직하는 것은 이질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합의된 수순 중 하나일 것이다. 전문적인 일터라 해도 어떤 시기에 이르러 은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이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누군가 오래 종사해오던 일을 그만두는 것을 하나의 단순한 단계라고 생각하기엔 그로 인한 `낭비`가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간 축적돼온 경험치를 생각하면 `은퇴`가 말 그대로 시간을 사장시켜버리는 판단 착오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자기만의 노하우로 무장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100세 시대, 노인 청년을 부르짖는 요즘 같은 때라면 60세 정년퇴직이란 섣부른 느낌까지 준다.

거의 반평생을 몸담아온 대가는 커리어인 동시에 낙오의 레테르도 안겨준다.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 흐름과 일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힘에 부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도래한 디지털 제너레이션에게도 반드시 고수해야만 할 개념적 가치는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로봇과 빅데이터가 지배하는 문화 속에서 끝까지 사수해야 할 철학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종이와 연필이 사라지고, 모바일이라는 사각형 안에서 모든 것이 신경 말단의 패턴으로 규정된다 해도 기본적인 절댓값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감각적이고 단순한 즉흥성만이 요즘 시대를 대변한다면 종국엔 속이 꽉 차지 못한 껍데기 같은 감각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

한 전문가가 경험과 실수와 해법 속에서 찾아낸 가치는 하나의 사조와 비견할 만한 중량감을 지닌다. 미국 보그의 그레이스 코딩턴이라는 패션 디렉터는 일흔 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그지의 중요한 패션 화보를 총괄하며 활발히 활동한다. 여든 살 나이에도 직접 생생한 아이디어로 디자인에 참여하는 카를 라거펠트는 명실상부한 샤넬의 마스코트다.

나 역시 언젠가 일본에서 영화 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대표 영화 제작사와 공동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나는 한국의 미술 감독으로 참여했다. 당시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영화 제작 현장의 시스템이나 복지 이전에 일본 스태프 나이가 한국 스태프 평균 나이에 비해 적어도 열 살 이상 많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온통 하얗게 센 미술 감독의 노련함은 그때 내가 만난 너무나 경이로운 세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간성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어떤 직업군에는 흐름에 반하지 않는 세대교체가 제때 이뤄져야 할 것이다. 활발한 피 돌기를 통해 주춤거리는 현재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형태의 소스를 제공해야 한다면. 그러나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오래 자리를 독점해온 특정한 이들에게 명예와 권위가 집중되는 경우를 가끔 보았다. 누군가 오래 자리를 지켜온 시간의 가치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실력 대신 자리 보전의 욕망만 두드러진다면 이제는 때가 됐음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신진을 위한 새로운 마당을 펼쳐주는 것 역시 진정한 연륜의 관대함 아닌가.

다음 세대를 위해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미덕에는 확실히 미묘한 부분이 도사리고 있다.
세대교체에는 여러 가지 연유가 있을 것이다. 인력 비용, 시대 흐름, 기술 변화 같은.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차분히 벼려진 숙련성, 견고하게 제련된 경험이 혹시 휘발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히 점검해봐야 한다. 동시에 고인 물은 썩는다는 양가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떠나보내야 할 때와 지켜야 할 때,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또 하나의 기회와 보존해야 할 주의(主義) 사이에서 얼마나 현명한 판단을 할 것인가. 우리가 새로 맞이하게 될 신세계를 위해 너무나 중요한 표준을 만드는 일인 것이다.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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