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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손현덕 칼럼] 싱가포르에서 날아온 비보(悲報)

  • 손현덕 
  • 입력 : 2018.01.10 17:16:46   수정 :2018.01.10 18: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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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하는 대신 거제 조선소를 찾았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건 한국 경제의 뇌관을 건드린 행보였다. 한국 경제에 위기가 닥친다면 그 진앙지는 아마도 조선 산업일 것이다. 위기는 엄중하고, 처방은 화급을 다툰다.
문 대통령 말마따나 조선 산업은 지금 불황기를 넘기면 재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조선 전문가들의 견해가 그렇다. 그러나 재도약을 시도하기도 전에 산업 자체가 붕괴될지 모를 위험에 처해 있다. 이 역시 전문가들의 일치된 생각이다. 지금이 변곡점이다. 위기는 3년 전쯤 대우조선에서 시작됐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0년 전쯤 STX에서 잉태된 것이긴 하다. 그래도 대한민국 조선 산업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1970년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달랑 한 장으로 시작한 한국의 조선 산업이다. 문 대통령이 대우조선 방문 때 탑승한 쇄빙LNG운반선은 그 도전정신이 후배들에게 전해졌기에 가능했다.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배를 잘 만드는 나라라고 하면 그게 대한민국이고, 고부가가치 선박은 한국에 맡겨야 안심이 된다는 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건 작은 틈에서 시작되는 법. 대한민국 조선 산업에 불길한 신호가 들어왔다. 국제 수주전에서 한국이 어이없는 참패를 맛본 게 바로 작은 틈이다. 지난달 우리나라 조선사가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의 해양플랜트 입찰에 참여했다. 누구도 한국이 수주에 실패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셈코프라고 하는 싱가포르의 작은 조선사에 뺏겼다. 싱가포르에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셈코프는 국제무대에서 명함도 못 내미는 기업이다. 한 건이 더 있다. 몇 달 전 세계 굴지의 프랑스 선사가 초대형 컨테이너선 9척을 주문했다. 이 역시 한국 조선사가 패배했다. LNG 추진선으로 2만2000TEU급이다. 대한민국이 독보적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다. 다른 나라는 엄두를 못 내는 선박 건조인데 중국 조선소 두 곳이 나눠 가졌다.

이 두 건의 수주 실패가 일시적인 거라면 그리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그 정도는 안 해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든지, 아니면 그거 가져오다간 저가 수주로 나중에 오히려 짐이 된다고 판단해 기꺼이 포기했다면 얘기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실력으로 밀렸다. 가격경쟁력이 안돼서, 그리고 금융이 받쳐주지 못해 이 수주전에서 패했다.

조선의 가격경쟁력은 인건비가 좌우한다. 설계비나 재료비 등은 어디든 비슷하다. 조선 3사가 혹독한 구조조정을 한다고는 하지만 근육보다는 체지방이 많다. 그걸 버티게 해준 것이 기술력이었다. 두 건의 수주 참패는 기술력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 가지 더. 구조조정이 방향을 잃으면 핵심 인력의 이탈을 부른다. 조선기술자들은 국제유목민이나 다름없다. 실력만 있으면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는다. 한국이 지금 처한 상황이 그렇다.

STX와 대우조선 사태는 금융의 위축을 불렀다. 섣불리 지원하다가는 책임을 면키 어렵다. 조선 수주는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는 국가대항전에 가깝다. 어느 나라든, 어느 조선사든 선박금융 없이 배를 짓는 경우는 없다. 그게 금융기관이 끊어주는 RG(환급보증)라는 건데 한국은 지금 여기서 발목이 잡혔다. 거제 대우 조선소에 문 대통령이 늦게 도착한 최종구 금융위원장을 보고 "금융이 빠지면 일이 안된다"고 말한 건 웃음 속에 칼을 감춘 `소리장도(笑裏藏刀)`였다.

활로를 몰라서 못 찾는 게 아니다.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옮기고, 금융이 받쳐주는 것. 알면서 못하니 문제다. 이걸 못하면 올해, 그리고 내년 대한민국 조선소는 일감이 사라질 것이다. 울산과 거제 조선소의 도크는 더욱 썰렁해지고 지역경제는 냉기가 돌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대량 실업과 함께 공멸을 맞을 것이다.

세계 1, 2, 3등 조선사를 가진 대한민국이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은 거제에서 2~3년 후 조선의 희망을 말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됐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조선의 절망을 말했어야 했다. 그래야 기업이 움직이고, 노조가 움직이고, 금융이 움직인다. 그래야 희망이 생긴다.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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