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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섭의 기업과 경제] 펀드재벌과 기업재벌

  • 입력 : 2018.04.01 17:16:22   수정 :2018.04.02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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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주주총회 시즌에서 화두는 이사회 중심 경영 강화였다. 정부의 강력한 재벌 정책에 기업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모양새다. 정부는 재벌주주들이 감사 선임에 3% 넘는 지분은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역차별` 상법 개정을 도입하면서까지 이사회를 이들로부터 `독립`시켜야만 기업이 좋아진다는 압력을 넣고 있다.

그러나 `주주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런 `개혁`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전무(全無)하다.
논리와 실증 없이 재벌의 영향력만 약화시키면 이사회가 `민주적`으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이사회라는 것을 통해 누가 실제로 힘을 발휘하고, 이들이 이사회를 잘 운영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한국 상장기업의 권력지형을 보면 외국인 투자자 36%, 국내 기관투자가 17%, 기업 24%, 개인 19%, 정부 3%가량으로 나뉘어 있다. 대기업의 경우는 삼성전자 52%, 현대차 46%, SK하이닉스 50% 등으로 외국인 투자자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을 보면 청지기 역할을 잘할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미국에서는 2010년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행동주의를 더 강화하기 위해 기관투자가들이 거의 `독립적으로` 기업 이사회 구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Rule 14a-11)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경영자협회와 상공회의소가 상소법원에 소송을 내서 1년간 심의 끝에 규제를 무효화했다.

이 결정에서 핵심적 내용은 기관투자가 스스로는 재벌식으로 펀드를 운용하는데, 기업에 이사회 독립성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상소법원은 기관투자가협회(ICI)에 기관투자가들이 이사회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문의했다.

ICI는 기관투자가의 83%가 단일이사회, 17%가 클러스터이사회로 운용된다고 밝혔다. 단일이사회는 계열사별 이사회 없이 재벌 기획조정실에서 계열사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클러스터이사회는 두 개 이상의 기조실이 계열사를 하부 그룹별로 나눠 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ICI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렇게 재벌식으로 펀드를 운용하는 것이 `엄청나게 효율적이고` 중앙에서 통제받지 않는 독립 이사들이 개별 펀드에 들어오게 되면 이들은 "태생적으로 이사회의 효과적 운용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항소법원은 ICI 보고서를 길게 인용하면서 SEC가 `말도 안되게 정신 나간 이유`로 규제 개정이 필요하다고 내세웠다고 통박했다. 행동주의 실행 주체인 기관투자가들이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내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기업재벌의 `적폐`라는 것만 들여다보면서 이것을 해결해야만 세상만사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개혁` 조치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온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에는 기업재벌이 `새발의 피`라고 느껴질 정도의 초재벌 기관투자가들이 대세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 이러한 기관투자가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이 앞장서 기업이 쌓은 자산을 빼내는 `약탈적 가치 착출`이 보편화됐다. 그 결과 중산층이 붕괴됐고 `1% 대 99%` 구도가 고착됐다.


현재 한국 상장기업의 권력지형을 볼 때 대기업에 `독립된` 이사회만 만들면 큰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세계적 펀드재벌들이 국내 기업재벌들을 개혁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터무니없는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그럴 자격과 능력이 없다는 것은 미국의 상소법원이 이미 확인해줬다.

정부가 해야 할 것은 기관과 기업이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기업의 중장기적 가치 상승을 담보할 `기관-기업 관계` 규제틀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일이다. 펀드재벌은 선하고 기업재벌은 악하다는 이분법에만 사로잡혀서는 경제를 제대로 키워나갈 수 없다.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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