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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매경포럼] 김지영과 이지혜

  • 심윤희
  • 입력 : 2017.11.06 17:42:34   수정 :2017.11.06 19: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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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과 이지혜. 그야말로 흔한 여성 이름이다.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때문에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 중 실제로 가장 많은 이름이라는 김지영. 소설은 현재 30대 중반이 된 평범한 여성 김지영이 학교를 다니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아 키우면서 겪는 이야기다. 극적인 플롯이 있지도, 폭포수 같은 감동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상황과 묘사가 리얼해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은 출간 1년 만에 40만부 고지를 바라보는 역대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돌풍을 일으킨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은밀한 차별과 여성이 맞닥뜨리는 팍팍한 현실을 들춰내서다. 성장기 남녀 차별, 직장 내 성 차별, 남녀 임금 차별 등 온갖 차별과 육아, 경력 단절, 몰래카메라, 데이트 폭력 등 여성 문제가 다 녹아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아프고 불편하다.

이 책을 읽었다는 한 남자 동료는 "여성에 대한 이렇게 많은 차별과 장벽들이 있는지 몰랐다. 새삼 놀랐다"고 했다. 김지영보다 10여 년 일찍 더 거친 터널을 통과한 나로서는 "몰랐다. 놀랍다"는 반응이 더 놀라웠다. 마초적인 관습과 문화를 느끼지 못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것이 사회가 쉽게 변하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다음은 이지혜. 역시 가상의 인물로 1990년생 여성이다. 김지영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이지혜는 보드게임의 캐릭터다. 게임 제작자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라는 주제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았다. 이 보드게임은 이지혜와 아빠, 엄마, 남동생, 남자 친구, 동성 친구 등이 등장한다. 이지혜가 부딪히는 20개의 성 차별 상황에 대해 본인은 답을 할 수 없고 주변 인물들이 토론해 답을 결정해야 한다. 선택에 따라 이지혜의 자존감과 순응도, 사회성, 감수성, 스트레스 등 스펙 수치가 오르내리고, 하나라도 0이 되면 이지혜는 죽는다는 설정이다. 문제는 이런 식이다. 이지혜가 개강 총회에 참석했는데 뒤 테이블의 남자 선배들이 신입생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이지혜가 해야 할 행동은? ① 자리를 피하며 못 들은 척한다 ② 일어나서 선배들에게 화를 낸다 ③ 거울을 꺼내 황급히 외모를 점검한다 ④ 테이블에서 남자 선배 순위를 매긴다. 이 같은 상황극을 통해 플레이어들이 여성들이 겪는 차별적 상황을 체험해보게 한다는 게 취지다. 이지혜를 오래 살게 하려면 적당히 타협하는 답을 골라야 하고 극단적인 답변을 이어가면 이지혜는 단명한다.

여성 차별 얘기가 나올 때면 식자층 남성들조차도 "이만하면 세상 많이 좋아진 것 아니냐"는 말을 많이 한다. 여성 장관 비율, 외시·행시 여성 합격자 비율의 증가 등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책 속에서 김지영도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고.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소설 속 김지영, 차별과 불합리에 몸서리치는 이지혜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나마 김지영, 이지혜 등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로 인해 `한국에서 여자로 살기`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확대되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다만 `김지영·이지혜 현상`이 여성들에 대한 무한 위로나 공분, `나도 그랬는데`류의 폭풍 공감으로 끝나버릴까봐 걱정된다. 실제로 이 책과 보드게임에 열광하는 이들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세상이 변하려면 이 문제에 둔감했던 남성들이 이 책을 읽고 보드게임도 직접 해봐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300명의 국회의원에게,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한 것은 공감의 정치라 할 만하다.

사실 저출산, 양성 평등,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일·가정 양립 등 지금 우리가 봉착해 있는 많은 문제는 여성의 삶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저출산 대책만 해도 그렇다.
매년 1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정치권이 여성들의 현실을 모르고 주먹구구로 만든 엉터리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김지영과 이지혜의 등장은 억눌림의 분출이다.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기회이자 낡은 관습과 제도까지 바꾸는 변곡점이 됐으면 한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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