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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매경포럼] 시대의 소음

  • 노원명
  • 입력 : 2017.10.25 17:22:34   수정 :2017.10.25 17: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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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국회의원이 문화재청장에게 따진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왜 숙종 대신 박정희 현판이 있는 겁니까?" 박정희 현판이 걸린 것은 1967년 현충사 새 건물을 지었을 때다. 숙종 현판은 새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구(舊) 현충사에 그대로 있다. 박정희 현판을 적폐라고 생각하는 의원은 또 이렇게 다그친다. "적폐 청산하라고 청장 만들어 드린 거 아닙니까?" 자리 줬으니 밥값 하라는 소리다. 문화재청장의 밥값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왜 박정희 현판은 적폐이고, 숙종 현판은 적폐가 아닌가. 숙종실록을 보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숙종이 저지른 실정을 백 가지는 넘게 찾아낼 수 있다. 숙종실록이 어려우면 장희빈을 다룬 드라마를 봐도 된다. 잇단 환국과 출척에 선비들이 죽어나갔고 왕실엔 위계질서가 없었다. 박정희 현판이 내걸린 지 50년. 50년 전 적폐를 따질 생각이면 300년 전이라고 못 따질 건 무언가. 이참에 숙종 현판도 내려버리고 `적폐 청정권`에서만 살아온 인물을 국민 공모해 새 현판을 쓰게 하는 건 어떤가. 그나저나 귀가 아프다.

부마항쟁 38주년 기념식에서 여당 대표가 말한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새로운 헌법 전문에 부마민주항쟁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더불어 명시하겠다고 각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5·18이 들어가는데 어찌 부마항쟁을 뺄 것인가. 영호남 지역 안배를 위해서도 함께 들어가는 게 좋다. 문 대통령은 이 두 사건 외에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지난해 촛불항쟁도 전문에 새겨넣겠노라 대선 후보 시절 약속했다. 그런데 세월호는? 세월호야말로 촛불혁명의 씨앗이니 낄 자격이 충분하다. 제주 4·3 항쟁은? 200명이 죽은 5·18을 넣으면서 2만명이 숨진 4·3을 빼면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넣는 게 좋겠다. 가만 보자. 한민족 민중항쟁 정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갑오농민전쟁에 닿지 않는가. 대한민국 건국 이전이라 어렵다고? 무슨 소리. 지금 전문에 들어간 3·1 운동도 건국 이전이다. 넣어야 한다. 기왕 농민항쟁을 포함시킨 마당에 홍경래의 난을 빼면 서운하다. 한반도 서북 지방을 배려하는 의미도 있으니 넣도록 하자. 아차차. 중세 고려 시대에 신분제 타파라는 근대의 횃불을 높이 쳐든 망이·망소이의 난을 빼먹을 뻔했다. 무조건 넣자. 헌법 전문이 너무 길어지지 않겠냐고? 뭔 상관인가. 기껏 잉크값, 종이값밖에 더 들겠나. 그나저나 귀가 또 아프다.

보수정권 때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봤다는 여성 방송인이 어느 진보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이제 조금 바뀌고 있다지만 다시 코미디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뉴스에 나와 `이명박 고소하겠다`고 인상 쓰고 그러니 내 자리에서 더 멀어지는 것 같아 암담하다." 내가 그녀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불편하지 않게 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20년은 된 것 같다. 그때 그녀는 유능한 코미디언이었다. 노무현정부 이후 그녀의 사회적 발언이 늘어나면서 세상은 그녀를 `소셜테이너`라 불렀다. 내가 채널 선택권을 갖지 못하는 상황, 예컨대 택시 라디오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의 일감이 끊긴 건 오직 블랙리스트 때문이었을까.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스탈린 치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을 다룬 최근작 `시대의 소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영혼은 셋 중 한 가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한 짓으로, 남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든 짓으로, 당신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 짓으로." 한때 뛰어난 코미디언이었던 그녀는 세상이 그녀를 더 이상 코미디언으로 봐 주지 않는 이유를 오직 남들이 자신에게 한 짓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시행착오로 점철된 혁명 초기 러시아를 둘러본 후 `러시아 기행`에서 이렇게 비꼬았다. "완전한 원을 보려면 무시무시한 세부들은 접어둘 수도 있다. 세부는 항상 그런 법이므로." 그렇다. 시대의 변화에는 소음이 따른다.
그건 접어둘 수 있는 `세부`가 아니겠나. 한편 반스는 이렇게 썼다. "나무를 쪼개면 파편이 튄다. 사회주의 건설자들이 즐겨 하는 말이다. 하지만 도끼를 내려놓고 보니 목재 야적장 전체에 온통 나무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았다면?"(시대의 소음). 그나저나 자꾸 귀가 아프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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