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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링컨의 분노

  • 노원명 
  • 입력 : 2017.09.20 17:25:41   수정 :2017.09.20 17: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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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3층 링컨룸을 일과 후에 들락거린 날이 많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올해 초 퇴임을 앞두고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외로워질 때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었다"고 말했다. 독서 리스트에는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들어간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안내한 링컨룸에는 링컨이 자필로 쓴 게티즈버그 연설문 사본이 보관돼 있다.
요즘 문 대통령은 북핵 고민에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밤이면 오바마처럼 문 대통령도 링컨 전기를 한 권 구해서 읽어보았으면 한다. 집권 1년차 대통령으로서 링컨과 문 대통령이 처한 환경에는 유사점이 있다. 둘 다 난세의 대통령이다. 링컨은 미국 건국 이래 조금씩 부풀어오르던 노예제라는 모순이 급기야 남부의 연방 탈퇴 움직임으로 화산처럼 분출하던 시점에 취임했다. 문 대통령은 휴전 이후 최대 안보사변인 북핵 클라이맥스에 임기를 시작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근본적 모순과 직면하는 지도자는 공동체 운명을 건 결단을 강요받는다.

링컨은 1860년 대선에서 공화당 당론인 노예제 폐지를 내걸고 당선됐지만 열광적 노예해방론자는 아니었다. 취임 초 링컨의 1차 관심은 연방 수호였다.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해방시켜야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는 노예옹호론자와 노예폐지론자 모두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링컨은 그러나 내면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사자가 숨어 있었다. 연방을 지키되 만약 노예제를 없애는 데 필요하다면 연방 분리도 불사하려는 단호한 의지가 그것이다"(월러 R 뉴웰 미국 칼턴대 교수). 연방 수호를 위해, 남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언급을 자제했으나 그는 젊어서부터 흑인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품었던 사람이다. 그 연민은 남부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때 분노로 타올랐다. 신생국 미국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는 전쟁을 결단한 바탕에는 그런 도덕적 분노가 있었다. 1863년 1월 노예해방문서에 서명한 후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노예제가 나쁘지 않다면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 북부를 단결시킨 것은 노예제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분노였다.

링컨의 현실적 목표가 남부의 분리 시도로부터 연방을 지켜내는 것이었다면 문 대통령의 지상과제는 북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링컨에게는 있고 문 대통령에게는 없는 게 하나 있다. 도덕적 목표다. 링컨은 노예 해방이라는 도덕적 목표를 앞세워 연방을 수호했다. 문 대통령은 평화와 전쟁 반대를 외친다. 그건 도덕적 목표가 못된다. 세상에는 불의와 타협하는 평화가 있는가 하면 정의를 지키는 전쟁도 있다. 평화와 반전(反戰)은 때로는 도덕적이고 때로는 비도덕적이다.

19세기 미국 북부인들에게 남부의 노예제가 그랬듯 이 시대 한국인에게는 자명한 분노 대상이 있다. 북의 3대 세습과 폭정, 인권유린이다. 이걸 끝장내거나 최소 그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일이 도덕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상하게도 한국 진보 진영은 우리 안의 모순에는 치를 떨면서도 그에 비할 수 없이 거대 모순인 북한 독재를 향해선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 안희정 충남지사가 문재인 당시 후보에게 "분노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했을 때 문 대통령은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반박했다. 문 대통령은 도덕적 분노가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는 공허하며 그 안에 역사를 진보시키는 에너지가 결여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시각은 북한을 바라볼 때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만약 북한이 불의가 아니라면 세상에 불의는 없다. 분노를 이끌어내지 않고는 국민을 단결시킬 수도 없고 북이라는 적폐와 싸워 이길 수도 없다.

국내에서 출간된 링컨 전기 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1년 펴낸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 있다. 전 세계 대통령 중 링컨 전기를 쓴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문 대통령은 이미 읽지 않았을까.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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