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 구독신청
검색전체보기
 

오피니언매경데스크 김주영

[매경데스크] 아카데미상과 블랙리스트

  • 김주영 
  • 입력 : 2017.03.02 17:44:46   수정 :2017.03.02 17:56:52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145942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변이 속출한 행사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다. 아카데미상 최고 영예인 작품상 수상자가 번복됐는가 하면,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배우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해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시상식을 보는 내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시상식이었지만, 그로 인한 불편함보다는 오히려 허를 찌르는 위트와 풍자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시상식 진행을 맡은 코미디언 지미 키멀은 거침없는 언변으로 풍자의 포문을 열었다. "국가가 분열돼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한데 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스카 시상식은 미국을 싫어하는 전 세계 225개국에 생중계되고 있다. 놀라운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또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지난해에는 오스카상에 인종차별적인 얘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졌다. 이게 다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라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지난해 아카데미상은 단 한 명의 흑인 수상자도 없는 백인들의 잔치로 `화이트 오스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덕에 오히려 `차별 반대`의 목소리를 대표하게 됐다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진 것이다.

실제로 올해는 `차별 없는 시상식`이 모토가 되면서 아카데미 작품상은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라라랜드를 제치고 문라이트가 거머쥐었다.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그린 `라라랜드`는 보수적인 아카데미상의 입맛에 딱 맞는 영화였지만 `미국 우선주의, 반이민정책`을 표방한 트럼프에 대한 반발 심리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완성도 높게 담아낸 `문라이트`에 상이 돌아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남우조연상은 아카데미 사상 처음으로 무슬림인 흑인배우 마허샬라 알리가 수상했다. 시상자로 나선 한 배우는 "이주 노동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우리를 분리하는 그 어떠한 장벽에도 반대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을 비난했다.

트럼프에 대한 비판의 압권은 메릴 스트리프였다. 그는 앞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공개적으로 트럼프를 비판했다가 트럼프에게서 "과대평가된 배우"라는 역공을 당한 바 있다. 명배우 메릴 스트리프를 겨냥해 키멀은 "한 여배우는 과대평가된 연기로 오랜 세월 건재하다. 그녀는 올해까지 20차례나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됐다. 우리는 올해도 습관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며 트럼프의 발언을 위트 넘치게 조롱해 객석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세계적인 문화행사에서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모양새는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송·영화로 청와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기업체 고위 임원의 퇴진을 종용하는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더군다나 상상도 할 수 없다. 심지어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인들을 이념으로 편가르기하고 옥죄려 했던 정권이 아닌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부러웠던 이유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 열린 재판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은 과거 좌파 진보세력에 편향된 정부 지원을 균형 있게 하기 위한 `비정상의 정상화`였다"며 "정책 결정은 정치적 이해관계이자 신념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곱씹어보면 사고의 위험성이 아주 심각한 지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 통합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입맛대로 정부 지원을 통해 이념의 편가르기를 하고 쥐락펴락하겠다는 발상이 고스란히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한 발상은 이참에 발본색원해야 한다.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란 감독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수상 소감은 곱씹어볼 만하다. "지금 전 세계를 우리 편과 적으로 나누는 행동은 전쟁을 의미하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우리들은 우리와 또 다른 사람들과 어느 때보다 공감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김주영 문화부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경데스크 김주영 더보기

오피니언 목록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