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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데스크 이은아

[매경데스크] 수첩과 포스트잇

  • 이은아
  • 입력 : 2017.02.09 17:21:51   수정 :2017.02.09 17: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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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물건 중 하나가 수첩이다.

대통령은 필요한 것을 평소 꼼꼼히 수첩에 메모했다가 인사 등 필요할 때면 수첩을 참고했다. `수첩인사`는 국민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됐고 대통령은 `수첩공주`라는 별명도 얻었다.

장관들과 청와대 수석들이 회의석상에서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수첩에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도 언론에 자주 노출됐다.
박 대통령은 "적지 않고 어떻게 기억을 하느냐. 제가 이야기하고 각 부처가 실천을 해야 하는데 안 적고 있으면 불안하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메모광이 있을 뿐이다`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준비된 원고를 읽고 장관과 수석들은 수첩에 받아 적었다. 김정은 옆에서 연로한 간부들이 고개를 조아린 채 열심히 받아 적는 북한의 회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죽했으면 집권 초기 `적는 자만이 생존한다`는 의미의 `적자생존`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

그런데 요즘 정부 부처에서 `수첩` 대접이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수첩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관련 검찰 수사에서 핵심 측근들이 깨알같이 받아 적고 녹음한 게 결정적 증거가 됐다.

안종범 전 대통령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의 업무수첩 17권, 510쪽은 모두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됐다. 이 업무수첩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2014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2년간의 대통령 지시 사항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는데 검찰은 이 수첩을 근거로 청와대가 재단 모금을 주도했고, 지난해 10월에는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며 내용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다.

수첩은 안 전 수석의 직권남용 혐의는 물론 박 대통령의 뇌물 혐의 수사와 직결되는 핵심 쟁점이 됐다. 특검은 이외에도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 30여 권을 추가로 확보했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도 마찬가지다.

이런 분위기 탓에 정부부처 공무원들은 요즘 `수첩`에 부쩍 신경을 쓴다고 한다. 중앙부처 공무원 A씨는 최근 간부회의 내용을 꼼꼼히 업무수첩에 메모하다가 상사에게 핀잔을 들었다. "혹시 내 이름을 수첩에 적어놓은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았다.

또 다른 공무원 B씨는 업무수첩을 아예 서랍에 넣어뒀다. 회의에 들어갈 때는 업무수첩 대신 포스트잇에 필요한 내용을 간단히 메모한다. B씨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그렇게 한다. 포스트잇에 그때그때 필요한 내용을 적었다가, 해당 업무가 끝나면 보관하지 않고 버려야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트잇마저도 쓰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하면 더욱 환영받는다고 한다. 회의 때 휴대전화를 들고 오지 말라고 지시하는 상사도 있다. 녹음될까 두려워서다. 미운 상사 이름을 수첩에 무작정 적어놓는 부하 직원들도 있다고 하니 일부 공무원들의 `수첩 공포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회의실에서 수첩이 사라지고 토론과 소통이 늘었다면 반길 일이다. 하지만 수첩의 자리를 포스트잇이 대신할 뿐이다.

민간기업 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가 발표한 한국형 기업문화 진단 보고서에는 `회의는 임원 의중 파악을 위한 것이다` `한국 기업 임원실은 엄숙한 장례식장 같다.
임원 앞에서 정자세로 서서 불명확하고 불합리한 업무 지시에 왜(Why)도, 아니다(No)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인다`는 의견이 소개됐을 정도다.

메모는 좋은 습관이고 수첩은 죄가 없다. 메모를 탓할 것이 아니라 소통 없는 받아 적기를 탓해야 한다.

회의실에서 사라진 수첩을 대신해야 할 것은 `증거를 없애고 책임 떠넘기기를 위한` 포스트잇이 아니라 토론과 소통이다.

[이은아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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