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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포럼 박정철

[매경데스크] 증오와 불신의 사회

  • 박정철 
  • 입력 : 2018.01.14 18:37:22   수정 :2018.01.14 21: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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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사망 부끄럽다" "사람 구하지도 못하며 쇼하러 출동" "우리나라에서처럼 기자가 깝죽대니 얻어터지지".

지금 대한민국은 증오와 불신의 사회다. 정부의 실정(失政)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는 물론 포항 강진, 충북 제천 화재, 중국의 한국 기자 폭행 등 각종 참사가 터질 때에도 악의적 댓글(악플)이 수없이 뒤따랐다. 가상공간의 익명에 숨어 날린 조소와 경멸은 피해자들의 상처를 또 한번 후비고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모두 29명이 숨진 제천 화재 때는 유족들이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댓글이 많다"며 처벌을 요구하는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리기까지 했다.
네이버에 따르면 뉴스 댓글 중 악플로 신고되는 건수가 하루 평균 5000여 건이다. 일본은 악플이 호의적 댓글(선플)의 4분의 1에 불과한 반면, 한국은 악플이 선플보다 4배나 많다. 다양한 의견 분출과 사회적 감시 등 순기능이 컸던 인터넷 댓글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이제는 상대를 폄훼하고 욕설과 분노를 내뱉는 `인격 살인의 장`으로 전락했지만, 당국이 단속에 나섰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엄정한 법과 절차에 따라 악플이 낳은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해야 할 법원과 검찰마저 적폐 사건을 놓고 편을 가른 채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로 내홍을 겪는 법원의 경우 소위 진보 판사들이 글을 올리는 익명 게시판에 "양승태(전 대법원장) 적폐종자 따까리들" "니들의 쓰레기 같은 억지, 트집잡기는 공해짓거리" 등 법원행정처 판사들을 향한 욕설과 막말이 난무하고 있다. 법원 안팎에선 "사회의 최후 성역인 사법부 권위가 무너졌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검찰 역시 `MB 정부의 다스 비자금` 수사를 놓고 악다구니하고 있다. 일부 검사들이 "정호영 전 BBK특검팀이 12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찾아내고도 덮었다"며 정 특검팀을 특수직무유기혐의로 처벌하라고 윽박지르자, 당시 파견검사는 내부전산망에 글을 올려 "검사로서 부끄러운 일을 한 적 없다"고 맞받았다.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당시 변창훈 검사의 자살로 진통을 겪은 지가 겨우 두 달 전인데 또다시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크 게이어존이 `당신은 세계 시민인가`(Global Citizens)에서 분류한 시민의식 수준에 따르면 한국은 여전히 자신과 진영논리만 챙기는 자기중심주의(1.0), 이념중심주의(2.0)에 빠져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 증오와 불신이 가득한 것은 무엇보다 사상 최고의 청년실업률, 심각한 주택난, 오락가락 교육정책 등 국정 실패의 탓이 크다. 하지만 정치권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다. 특히 여권은 이명박·박근혜 과거 정권을 겨냥한 열성 지지자들의 공세를 묵인하면서 지난 10년간 쌓인 적폐를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내겠다는 식의 정략적 접근을 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지자들의 언론에 대한 격한 비난에 대해 "나와 생각이 같건 다르건 유권자인 국민의 의사 표시라고 받아들인다. 국민 비판에 좀 담담하게 생각하고 너무 예민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하루 뒤 법무부의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발표에 핵심 지지층인 20·30대 투자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청와대는 "확정된 게 없다"며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층 공격에는 `오불관언`하던 청와대가 대통령과 자신들을 겨냥한 역풍에는 재빨리 고개를 숙인 것이다.

독일 저널리스트인 카롤린 엠케는 저서 `혐오사회`에서 "증오와 공포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들은 증오와 공포에 불을 붙이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라며 "분출된 증오가 향하는 대상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은밀하게 묵인하지 않았다면 증오는 그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증오는 사회 통합을 막고 국론을 분열시키며 국가 발전에도 걸림돌이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교착상태였던 남북 관계마저 조금씩 해빙되는 마당에 우리가 `남남 갈등`으로 날을 지새울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서로의 허물은 용서하고 껴안는, 관용과 배려의 세상을 만들어야 할 때다. 여권이 밀어붙이는 적폐 청산도 정권의 한풀이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국정농단의 핵심 인물들은 엄벌하되, 남은 관련자들은 포용해 국가 도약에 동참할 기회를 줘야 한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우리는 서로 관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무분별하고 변하기 쉽고 실수가 많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해 무술년이 증오와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지고, 덕을 합하여 길을 함께 가는(合德同道)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박정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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