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 구독신청
검색전체보기
 

오피니언매경 데스크 박정철

[매경데스크] '여론몰이' 재판은 또 다른 적폐다

  • 박정철
  • 입력 : 2017.12.10 18:10:39   수정 :2017.12.11 10:01:26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817380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번에 선처해주시면 앞으로 저희 아들이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993년 11월 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는 사노맹 계열조직인 `남한 사회주의 과학원`을 결성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조국 울산대 교수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가입죄를 적용하고도 집행유예로 신병을 풀어준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재판장은 보수중도 성향의 김황식 전 국무총리였다.
법원 관계자는 "당시 조 교수의 부모가 눈물로 쓴 탄원서를 재판부가 읽고 고민하다가 핵심 인물인 조 교수에게 재기할 기회를 준 것으로 안다"며 "판결을 놓고 보수 측 반발이 상당했다"고 전했다. 법원 선고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박사 학위를 받은 조 교수는 2001년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고, 문재인정부 들어선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에 올랐다. 단 한 번의 판결이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셈이다. `인신구속`의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는 법원이 최근 주요 적폐사건 처리를 놓고 내우외환을 겪고 있다.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지난 8일 `돈봉투 만찬` 사건으로 기소된 이영렬 전 서울지검장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인터넷에선 "네가 적폐다" "똥강아지 판사" 등 재판부를 조롱하는 수천 개 글이 쏟아졌다. 얼마 전에는 신광렬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댓글공작 등 혐의로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을 구속적부심에서 풀어줬다가 네티즌과 더불어민주당에서 "사법부 양아치" "국민과 떼창으로 욕하고 싶다" 등 온갖 인신공격을 당했고, 동료 판사로부터도 야유를 받았다.

지난 6월에는 강부영 판사가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 영장을 기각했다는 이유로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됐고, 7월에는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 장관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황병헌 판사가 "과거 라면을 훔친 도둑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는 황당한 가짜뉴스로 곤욕을 치렀다.

반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전병헌 전 대통령 정무수석의 영장이 기각되고, 측근인 한국e스포츠협회 사무총장 조 모씨가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됐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인신공격이 드물었다. 한마디로 여권과 진보진영의 일부 세력이 자신들 입맛에 맞는 법원 결정에는 박수를 치다가, 정작 자신들 판단과 다르면 `적폐 프레임`을 씌워 난도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법원을 압박함으로써, 적폐사건 연루자들을 응징하고 국정 운영에도 반사적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민심을 자극해 여론재판을 부추기고, 무차별 공격으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행위는 또 다른 적폐다. 이런 `외풍`에 법원이 휘둘려선 안 된다. 헌법 제103조에 따라 법관은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해야 한다. 정권이 보수진영에서 진보진영으로 바뀌었다고 눈치를 살피는 것은 5·6공 시절 군사정권에 줄을 대려고 정치판사들이 걸었던 오욕의 전철을 밟는 것과 다름없다. 양삼승 변호사가 `권력, 정의, 판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은 폭풍 속을 나는 새처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말하는 용기 있는 판사가 필요하다.

하퍼 리가 쓴 `앵무새 죽이기`에서 주인공 아버지인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딸에게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애써도 공정할 수만은 없다"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검찰이 수사하고 재판에 넘긴 적폐사건 가운데 일부 공직자와 기업인의 경우 억울하고 부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국가 안보와 자유 수호를 위해, 또는 통치자의 강요에 의해 불가피하게 가담한 정황이 곳곳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법원이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파헤쳐 사안의 경중을 따지고 판단해야 모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다. 헌법 제27조에는 유죄판결 확정 시까지 피의자와 피고인을 함부로 범인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돼 있다. 99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될 일이다.

외풍 못지않게 법원 내부의 간섭도 문제다.
법조계 원로인 한승헌 변호사는 평소 "법관의 독립은 외풍뿐 아니라 법원 내부의 관료적 간섭, 즉 내풍에 의해서도 휘둘릴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 출범 후 진보 색채인 옛 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의 발언권이 커진 상황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같은 연구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정 세력의 병풍이 돼선 곤란하다.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김 대법원장이 엄정 중립의 자세로 외풍 못지않게 내풍도 배격해야 한다. 그래야 법원이 국민의 기본권과 정의를 수호하는 양심의 최후 보루가 될 수 있다.

[박정철 사회부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경 데스크 박정철 더보기

오피니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