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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 데스크 박정철

[매경데스크] 국민은 볼모가 아니다

  • 박정철 
  • 입력 : 2017.02.26 17:33:29   수정 :2017.02.26 20: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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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한민국의 기준으로는 그것도 범법 행위임을 인정합니다. 저를 무겁게 처벌해주셔서 승리자도 법과 정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법과 정의의 새로운 대한민국을 감당하게 해주십시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캠프 정무팀장으로 기업들로부터 65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아 기소된 안희정 충남지사는 1심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과거에는 악법을 어기며 저항했지만 앞으로 철저히 법을 지키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화염병을 던지고 혁명을 외쳐온 운동권 출신이지만, 생떼를 부리지 않고 법 절차에 따라 죗값을 치르겠다는 그의 태도에 많은 국민은 박수를 보냈다.
낡은 필름처럼 오래된 안 지사의 법정 장면을 새삼 꺼낸 것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둘러싼 정국 혼란 때문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 세력과 기각을 주장하는 태극기 세력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충돌 직전이다. `기각되면 혁명, 인용되면 내란`이라는 양측의 섬뜩한 구호와 대치는 1945년 광복 후 한반도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세력 간 충돌을 연상케 한다. 당시 남북은 신탁과 반탁, 좌파와 우파로 분열됐고 남북이 각각 정부 수립에 나서면서 결국 나라의 허리가 잘리는 비극을 불러왔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70여 년 전처럼 내 편, 네 편으로 찢기고 후폭풍 또한 엄청날 게 뻔하다. 이런 국론 분열을 피하고 `정치 내전`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면 무엇보다 사태 원인 제공자인 박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루빨리 측근들의 국정농단에 대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두 극렬 세력에 자제를 당부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아직 헌재의 최종 결정 전까지 기회가 남아 있다. "모든 게 내 불찰이고 내 책임이다. 혹여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다"는 각오로 온몸을 던질 때다. 특검이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내려고 희생양 삼은 기업 총수에 대해서도 "국가 경제를 위해 선처해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기업이 거액의 돈을 청와대와 최순실에게 준 것은 생사 여탈권을 쥔 권력의 요구에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협조한 측면이 크다.

대통령이 국민 통합과 경제 회생이라는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면 대통령을 믿고 지지해온 국민들 상당수의 분노와 배신감도 가라앉고 탄핵과 대통령 진퇴에 대한 정치적 해법의 단초도 마련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보수가 살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통령을) 파면하면 국가적 혼란이 엄청날 것이다" "시가전이 생기고 아스팔트가 피로 덮일 것이다" 식의 으름장만 놓는다면 국민 지지보다 공분만 살 뿐이다. 대통령으로선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법적 심판과 별개로 나라가 결딴날 지경에 이른 데 대해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국민 다수의 정서다. 자신을 보좌한 비서실장과 장차관 등이 줄줄이 구속됐는데 측근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청와대 참모들 역시 대통령 입속의 혀처럼 굴지 말고, 나라를 진정으로 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언을 해야 한다. 시어도어 젤딘 옥스퍼드 성 안토니 칼리지 명예교수는 `인생의 발견`에서 "영국 궁정광대인 리처드 탈턴은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면전에 대고 국정을 거침없이 비판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에게 궁궐 밖 민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참모라면 당장 사퇴하는 게 낫다.

촛불집회를 지지층 결집의 기회로 삼으려는 야당 주자들의 행태도 문제다. 촛불 세력의 분노를 부추겨 편가르기에 나서면 집권하더라도 정치 보복과 피바람의 악순환만 반복될 뿐이다.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제안처럼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 대타협을 이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것이 야당 주자들이 해야 할 책무다.


박 대통령은 에세이 `내 마음의 여정`에서 "남의 탓이라고 툭하면 비난하고 원망을 잘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해 그만큼 자신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하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연출해야 하는 지혜와 용기를 다했다면 후회나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풍랑이 거센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누구나 두려운 일이다. 대통령이 사즉생의 결단으로 마지막 명예를 지키느냐, 아니면 혼군(昏君)으로 남느냐는 역사적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에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다.

[박정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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