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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덕 칼럼] 에어컨 체제

  • 장경덕 
  • 입력 : 2018.07.10 17:19:21   수정 :2018.07.10 17: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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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갔을 때 싱가포르는 무척 무더웠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갈 때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폭염의 나라에서도 실내는 충분히 쾌적하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李光耀)가 지난 밀레니엄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았던 에어컨 덕분이다.
에어컨은 이 나라가 열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사실 싱가포르의 국가 운영체제도 에어컨을 닮았다. 스트레이츠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에어컨 국가 싱가포르(Singapore : The Air-conditioned Nation)`라는 책을 쓴 체리언 조지는 이 나라가 에어컨처럼 작동한다고 보았다. 사람들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지만 그만큼 치밀한 통제가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것.

실제로 싱가포르는 독특한 통제 모델로 경제적 번영에 필요한 체제 안정을 유지했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8000달러로 우리나라의 두 배 가까웠다. 인구 570만명의 이 도시국가는 실질구매력(PPP) 기준 1인당 소득이 9만달러를 넘는다.

중국의 변혁을 이끈 덩샤오핑은 심각한 진통 없이 번영을 이룬 싱가포르 모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정은도 집권 후 중국을 빼고는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 나라에서 부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완전한 서구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발전모델은 쉽게 이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에어컨은 이기적인 시스템이다. 에어컨을 돌릴 때는 창문을 닫아야 한다. 이때 실내에서는 더 쾌적하게 느끼지만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 때문에 외부자들은 더 불쾌해진다. 전체적으로는 냉방을 할 때 역설적으로 더 많은 열이 나온다. 또한 에어컨을 가동하려면 중앙의 통제가 필요하다. 믿을 만한 관리자가 끊임없이 시스템을 보살펴야 한다.

에어컨 체제로 운영되는 국가는 내부자와 외부자를 나누는 배타성과 폐쇄성, 그리고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며, 장기적으로 무엇이 바람직한 길인지 중앙의 권력이 판단한다. 리콴유와 같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신망을 받는 지도자의 치밀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김정은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한계가 되레 장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권위주의적인 에어컨 국가 모델이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1인당 소득 1000달러대에 머무르고 있는 북한이 그 한계에 이르려면 한참 걸릴 터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싱가포르의 발전모델을 좇는다면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싱가포르에는 글로벌 관점을 갖고 부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지킨 리콴유 같은 지도자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와 달리 경제는 완전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시스템으로 운용했다. 북한은 과연 언제 그런 단계에 이를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은 싱가포르 모델을 다른 관점에서 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개발연대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에어컨 국가 모델을 거쳤다. 이제는 산업화 시대의 성취를 바탕으로 싱가포르보다 성숙한 민주주의 꽃을 피워야 할 때다. 그래도 문 대통령으로서는 싱가포르가 누리는 소득 6만달러 시대의 번영은 부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효율과 평등을 함께 추구하면서 번영을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리콴유의 예견대로 언젠가 개개인이 가볍게 입을 수 있는 맞춤형 에어컨이 나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앙통제식 에어컨 국가도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체제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개인은 공동체 문제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이용자에게 쾌적한 에어컨의 부정적인 외부효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 발전을 함께 추구하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를 조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싱가포르의 발전모델과 국가 운영체제는 남북 정상 모두에게 관심거리일 것이다. 김정은은 에어컨 국가의 장점을 본뜰 생각을 하고, 문 대통령은 그 모델의 한계를 넘을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몇 달 후 둘이 다시 만나면 싱가포르의 에어컨 이야기를 나눠도 좋지 않을까.

[장경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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