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 구독신청
검색전체보기
 

오피니언장경덕 칼럼

[장경덕 칼럼] 눈물의 소주

  • 장경덕 
  • 입력 : 2017.08.22 17:19:49   수정 :2017.08.22 20:24:43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562902 기사의 0번째 이미지
1997년 여름 나는 런던에 있었다. 그해 8월 1파운드는 지금과 비슷한 1400원이었다. 대선을 앞둔 한국은 평온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벼랑 끝에 몰렸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때 얼마든지 거대한 위기의 전조를 느낄 수 있었고 느껴야 했다.
두세 달 후 우리는 국가부도의 벼랑에 몰렸다. 1파운드는 3000원까지 치솟았다. 우리가 엄청난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된 것처럼 묘사하는 외국 언론을 대하면 자존심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정말 이대로 나라가 망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그런 때 소주 한 잔은 큰 위로였다. 당시 런던 식당의 소주값은 18파운드였다. 한 병에 5만4000원 하는 소주를 마실 때의 씁쓸함이란.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10년 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왔지만 우리는 어찌어찌해서 최악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 차례 위기의 전조가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그보다 여러 번 경보를 울렸다. 그러나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던 환란 같은 사태는 없었다. 눈물의 소주는 기억에서 멀어졌다.

오늘 저녁 소주 약속이 있는 나는 잠시 지난 20년을 돌아본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한국 경제는 과연 위기를 겪고 더 강해졌을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닐까.

큰 그림부터 보자. 지난해 우리나라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환란 직전의 3.4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가계의 총처분가능소득은 2.9배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수출이 무너지면 성장을 받쳐주어야 할 내수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지난 20년 새 전국 주택시가총액은 4.4배로, 국부총액(국민순자산)은 4.1배로 불어났다. 국부는 환란 전 GDP의 6.3배에서 지난해 8배로 불어났다. 소득 창출 능력에 비해 자산가치가 더 빠르게 불어난 건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자산시장에 거품이 끼지 않았는지, 당대의 노력보다는 선대가 물려주는 부가 더 중요해지면서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유지해준 기회의 문이 닫히고 있는 건 아닌지 늘 경계해야 한다.

빚은 소득이나 자산보다 더 빨리 불어났다. 가계와 기업부문 금융부채는 20년 새 각각 6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광의통화(M2)는 5.5배, 광의유동성(L)은 6.3배로 급증했다. 부채와 유동성은 GDP 증가의 두 배 가까운 속도로 늘어났다. 외환위기 후 시중에 돈이 더 많이 풀렸고, 가계와 기업은 빚을 더 많이 냈으며, 생산과 소득에 비해 자산이 더 빠르게 불어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고,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적게 낳고 있다. 식당의 허드렛일과 건설 현장의 힘든 노동은 외국인들에게 맡기고 있다. 기업들은 사람을 더 쓰기보다는 더 똑똑해진 로봇을 들여놓고 있다. 2015년 제조업 1만명당 로봇 대수에서 한국(531대)은 세계 평균(69대)은 물론 일본(305대)과 독일(301대)도 크게 앞서고 있다. 반도체산업은 다시 날개를 달았지만 자동차와 조선 같은 주력 산업들은 창조적 파괴에 굼뜨고 중국에 밀려 위기를 맞았다.

일자리는 말라가고 소득과 부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사람들은 갈수록 더 불평등을 참지 않으려 한다. GDP 성장률은 지난 20년 동안 한 해 평균 0.26%포인트씩 떨어졌다.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면서 양적 투입에 의존한 성장은 한계에 이르렀다. 생산성 혁명이 없다면 제로 성장 시대가 닥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 정도면 지금 한국 경제는 위기에 빠져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다른 위기다. 지난 두 번의 위기는 유동성 위기였다. 환란 때 기업들은 무리하게 빚을 얻어 투자했다 위기를 맞았다. 고환율과 저금리 정책으로 금세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감하게 투자할 거리가 없는 게 문제다.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정부가 근본적인 구조개혁보다 단기적인 일자리 대책에 몰두한다면 넘을 수 없는 위기다.
환란 때와 달리 정치권이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지 못하는 것도 걱정스럽다.

예고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지금을 위기라고 말하고 싶다. 20년 전 위기 때 마셨던 눈물의 소주는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고 싶다.

[장경덕 논설위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경덕 칼럼 더보기

오피니언 목록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