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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 칼럼] 제인즈빌의 악몽, 군산의 고통

  • 손현덕 
  • 입력 : 2018.03.06 17:25:33   수정 :2018.03.06 19: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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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GM 근로자들의 희망퇴직 신청이 마감된 지난 2일 오후. 군산 소룡동 공장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차량 400여 대를 수용할 수 있는 정문 주차장엔 단 4대의 승용차가 주차돼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친 정문을 통과해 프레스-차체-도장-조립-엔진 공장까지 이르는 2㎞ 가까운 생산라인을 따라가면서 단 한 명의 근로자도 만날 수 없었다.

GM 본사는 전 직원에게 폐쇄 소식을 알렸다.
설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달 13일이었다. 이 순간 공장은 멈춰 섰다. 공장만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오식도동 식당가와 인근 생활 시설도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우연치고는 참 묘하다. 10년 전 미국 위스콘신주 제인즈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연휴 이틀 전이었다. 12월 23일 오전 7시 7분. 검은색 9인승 럭셔리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가 조립라인 끝에 도착했다. 전 좌석에 열선을 깔고 알루미늄 휠에 보스 스피커를 장착한 GM의 자랑, 쉐보레 `타호(Tahoe)`였다. 산타 모자를 쓴 다섯 명의 근로자가 `제인즈빌 조립라인에서 나온 마지막 차량`이라고 쓰여진 배너를 들었다. 모든 근로자들이 타호 뒤에 섰다. 그들은 타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각자 배너에 서명을 하고 서로를 끌어안고 복받친 눈물을 흘렸다. 이 광경을 어느 TV의 카메라 기자가 촬영했고, 그 덕분에 이날의 비극적 상황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39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서쪽으로 2시간 달리면 도착하는 조용한 시골 마을, 제인즈빌은 GM의 첫 공장이 들어선 곳이었다. 1919년에 설립됐으니 89년 만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축구장 10개 크기의 공장은 폐허로 변했고 여기서 근무하던 7000명의 근로자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부품을 공급하던 협력업체, 이들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던 자영업자들까지 도시 전체가 타격을 받았다.

현직 미국 정치의 실세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제인즈빌 출신이다. 그는 당시 GM의 회장인 릭 왜거너에게 "만약 공장 문을 닫으면 도시를 파괴하는 건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보조금과 세제혜택까지 제공하겠다는 당근을 제시했지만 결국 GM 공장은 문을 닫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날벼락을 맞은 제인즈빌처럼 군산 역시 설 연휴를 이틀 앞둔 시점에서 핵폭탄이 떨어졌다. 정치권이 그런 GM의 매몰찬 행동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들, 정부가 부실의 원인을 파고들어 책임 추궁을 한들 GM에 공장을 계속 돌릴 인센티브를 준다 한들, 지자체에서 GM 자동차 불매 운동을 벌인다 한들, 그리고 한국GM 노조가 강력 투쟁을 한다 한들 GM은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넜다. 폐쇄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보는 게 상식적이고 냉정한 판단이다.

일자리를 잃은 뒤 제인즈빌 노동자들의 삶은 척박하고 고단했다. 그걸 워싱턴포스트의 에이미 골드스타인 기자가 `제인즈빌 : 미국 이야기`란 책에서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 힘든 시기에 정치인들이 속삭였던 달콤한 약속은 제인즈빌 주민들에게는 희망 고문이었다. 통근 거리가 400㎞가 넘는 직장으로 자리를 옮겨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 사람은 그중 다행이었다. 누구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을 받아들여야 했다.

2008년 제인즈빌의 참극을 초래한 원인과 2018년 군산의 비극을 부른 원인은 기본적으론 같다. GM의 제품 경쟁력 약화이고, 그 뿌리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경영이다. 그렇게 회사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걸 경영진과 모든 근로자가 인지했지만 누구도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은 놓지 않았다.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정부가 일자리와 생계의 터전을 잃은 군산 시민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협력업체에 대한 지원도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은 군산이 예전의 GM의 도시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제인즈빌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인즈빌 주민들은 그 사실에 감사하지 않았다. 어쩌면 군산도 그럴지 모른다. 위기를 피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기업, 도시, 그리고 국가의 불가피한 고통이다.

[논설실장 손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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