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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손현덕 칼럼

[손현덕 칼럼] 힐러리의 무대

  • 입력 : 2017.10.17 17:10:51   수정 :2017.10.17 21: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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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늘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이자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인 엘리너. 그녀는 정계에 몸담은 여성 지도자들에게 "무소 가죽처럼 질긴 피부를 키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 그녀의 삶이 그랬다. 대통령 영부인으로, 상원의원으로, 국무장관으로,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40대 중반부터 25년간을 어느 근육질 남자보다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다.
작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인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한 날, 그녀는 맨해튼 뉴요커 호텔에서 승복 연설을 했다. 공교롭게도 그 호텔은 1971년 무하마드 알리가 조 프레이저를 상대로 첫 패배를 당한 뒤 하룻밤 머물렀고, 거기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곳이다. 그날 그녀는 잠을 설쳤다. 화가 나서, 억울해서가 아니라 얼굴이 아파서였다. 지지자들이 우는 걸 보고 정작 본인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웃음을 지은 게 안면 근육 마비란 불상사를 가져온 것이다.

힐러리는 보라색 옷을 입었다. 민주당의 파랑과 공화당의 빨강을 섞으면 나오는 보라. 대통령이 돼 워싱턴으로 가는 날 입으려고 했던 옷이다. 몸서리치는 패배였지만 억지로라도 화합을 말해야 했다.

8년 전인 2009년 그녀는 한국을 찾았다. 국무장관으로서 첫 해외 방문지가 우리나라였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들렀다. 그곳에 있는 사각형의 군사정전위원회 건물은 반은 남쪽에, 나머지 반은 북쪽에 위치한다. 회의용 탁자도 정확히 경계선에 놓여 있다. 북한 병사가 힐러리 장관의 방문을 지나칠 리 없었다. 최대한 쌀쌀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힐러리는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그녀는 브리핑에 집중했고 여유 있는 미소로 일관했다. 그 흔치 않은 순간을 뉴욕타임스가 포착해 1면에 실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개인적으로 힐러리를 두세 차례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용인하지 않았고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연설을 할 때도, 심지어 사진을 찍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언어 선택의 부적절함을 경멸한다. 단 하나의 단어조차도 그 뉘앙스가 가져올지 모를 오해를 생각한다. 대선 캠페인 도중 실수가 한 번 있었는데 즉각 사과했을 정도로 결벽증이 있다. 그녀는 언어 사용의 공허함에 질색한다.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레터릭과 구체성이 결여된 포장술을 경계한다. 트위터를 통해 정제되지 않는 언어를 쏟아내는 트럼프 대통령과 사사건건 부닥치는 것도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성격 차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힐러리는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과는 감정의 골이 깊다. 그녀는 새로 낸 책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Happened)`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한바탕 펼쳐놓았다.

공화당이 집권한 지금 그녀는 워싱턴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정책에 나름 지분을 갖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만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대외정책에 관한 한 의회에 미치는 입김이 세고 야당인 민주당에서 그녀는 분명 존재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트럼프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여전히 싸울 가치가 있다"고 투지를 불태운다.

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힐러리. 오늘 그녀가 서울 장충아레나에서 열리는 세계지식포럼 무대에 선다. 아마도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에 바지 정장 차림을 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어떤 질문이 나올지, 그 질문엔 어떻게 대답할지, 또 행사장엔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에 대해서 사전 준비와 조사를 마쳤다. 지난 주말엔 보안요원을 미리 보내 무대 설치와 의자 쿠션, 그리고 동선까지 체크했다. 그녀의 완벽함은 칠순의 나이에도, 공직을 맡지 않아도 변함이 없다.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취약해진 한미 동맹에 대한 걱정이 크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빚어내는 글로벌 정세의 불안에 대한 우려도 깊다. 이런 상황에서 힐러리는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는 북핵발(發) 한반도 안보 위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것이다. 또 오늘 19차 당대회에서 제2기를 출범시킬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몰고 올 격랑의 동북아 정세에 대해서도 통찰력을 던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메시지를.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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