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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 칼럼] 성조기와 인공기 앞에서

  • 손현덕 
  • 입력 : 2018.06.12 17:19:43   수정 :2018.06.12 19: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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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오전 9시 2분(한국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옆자리에 존 볼턴 국가안전보좌관을 태우고 `비스트(Beast·야수)`로 불리는 전용차 `캐딜락 원`에 몸을 실었다. 11분 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짙게 선팅한 방탄용 벤츠S600 리무진을 타고 세인트레지스호텔을 빠져나갔다. 오전 10시 4분. 역사적인 날인 6월 12일을 염두에 둔 듯, 각각 6기의 성조기와 인공기가 엇갈려 배치된 센토사섬 카펠라호텔. T자(字)형의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에서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만났다. 부드럽게 악수를 나누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드라마 작가라면 아마도 두 정상의 만남을 `북한의 핵도박`을 다룬 시리즈물의 마지막 에피소드로 잡았을 것이다. 진한 여운을 남기면서.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를 뜻하는 센토사섬에 수십 대의 군용기와 헬리콥터를 동원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44개국 415개 언론사에서 파견된 2500여 명 기자들의 눈과 귀가 세기적 회담에 쏠렸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날 센토사는 평화와 고요의 섬이 아니었다.

`북한의 핵도박` 첫 에피소드는 29년 전 작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1989년 프랑스 상업위성이 촬영한 영변 사진이 공개된다. 흙과 나무로 은폐했으나 핵폐기물 저장소란 의심을 샀다. 국제사회는 북한에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역공을 펼친다. 이게 `북핵 위기`의 시발점이다.

그 후 참으로 지루한 핵협상이 진행됐다. 북한은 비슷한 패턴으로 핵폐기를 약속했다가 얼마 안 가 다시 파기하고, 이에 상응해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도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한다. 25년간을 그렇게 했다. 시청자가 다들 달아날 것 같았으나 돌연 극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시리즈 마지막 몇 편부터 시청률이 급격히 상승했다. 주역이 세 명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 그리고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전환점이었다.

굳이 해설을 곁들이자면 드라마의 핵심은 북한이 국제무대에 정상국가로 데뷔를 한 점이다. 김 위원장이 처음으로 일정을 공개하고 해외 출장을 떠났다. 그동안에 잠시 중국을 다녀온 적은 있으나 이조차도 국내에 복귀해 외유 사실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싱가포르행을 미리 알렸고 회담 이틀 전 중국에서 빌린 항공기를 타고 창이 공항에 내리는 모습이 전 세계에 공개됐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을 정상국가로 대접하지 않았다. 양국 정상이 만난다는 건 그 자체가 사실상 정부 승인이나 다름없다. 국제법상 일종의 묵시적 승인에 해당된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를 만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카스트로를 만난 건 국교정상화 이후인 2015년이었고 그것도 형이 아닌 동생 라울이었다. 베트남과도 그랬다. 트럼프의 파격은 예외를 만들었다. 회담에서 무엇을 얼마나 도출할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찌 보면 트럼프와 김정은의 악수다.

드라마의 마지막 편인 미·북 정상의 센토사 회담은 북한의 비핵화를 매듭짓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도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마무리됐다. 따라서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질 않는다.

시즌2가 불가피하고 첫 장면은 센토사 회담을 이어받는다. 성조기와 인공기를 엇갈려 세워놓고 양국 정상이 직사각형 탁자에 놓인 공동합의문에 서명한다. `새로운 미·북 관계를 수립하고,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를 구축하고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다.` 배경음악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환희와 인류애의 메시지를 담은 `합창` 4악장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이 쉽지 않다. 양국 정상의 워싱턴-평양 교차방문, 북한 핵사찰과 검증, 핵무기의 반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셈법, 북한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경제협력 등등…. 스토리의 소재는 무궁무진하고 에피소드를 구성할 꼭지는 넘치나 방향을 감 잡기는 힘들다. 그래서 장담하건대 시즌2는 지금까지 보아온 시즌1보다 훨씬 흥미롭고 훨씬 긴박할 것 같다. 다만 시즌2의 타이틀은 `맛`은 좀 떨어지더라도 바꾸는 게 낫겠다. `한반도 평화의 여정`으로. 훗날 역사가 이 제목을 뒤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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