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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 데스크

[매경데스크] 달러의 여행

  • 노영우 
  • 입력 : 2018.09.03 00:07:01   수정 :2018.09.03 10: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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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미국이 무지막지하게 달러를 찍어내기 시작한 때 달러의 세계 여행은 본격화됐다. 아무 돈이나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한국 원화가 세계를 여행한다면 입국이 거부되는 나라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달러는 달랐다.
세계 모든 나라가 환영했다. 달러를 외국으로 보내야 하는 미국 입장과 그 달러를 받아야 하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교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미국에서는 달러가 세계 여행을 안 떠났다면 끔찍한 결과가 불가피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이 양적완화(QE) 정책을 통해 새로 찍어낸 돈만 무려 3조8000억달러다. 이 돈이 미국에 있었다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달러의 몸값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금융위기로 침체에 빠진 경제를 막대한 돈을 풀어 살리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 돈이 미국에 있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달러의 세계 여행을 조장해야 할 절박한 이유였다.

세계 각국은 달러가 제 발로 찾아오니 반가웠다. 경제 여건이 좋지 않은 신흥국일수록 달러는 환영받았다. 이들은 물건을 팔고 달러를 받아왔고 어떨 땐 싼 이자를 주고 달러를 빌렸다. 처음에 조금 오다 말겠지 했던 달러는 5년 동안이나 물밀듯이 밀려왔다. 각국은 밀려오는 달러를 곳간에 쌓아뒀다.

각국은 곳간에 달러가 넘쳐난다며 좋아했지만 사실 혜택은 미국이 봤다. 수조 달러를 찍어내도 세계 곳곳에서 이를 받아주고 곳간에 쌓아주니 수요가 늘면서 달러값은 오히려 올랐다. 세계 각국 통화와 비교한 달러값을 표시하는 달러인덱스는 2009년 70대 후반이었지만 2018년에는 95를 오르내린다. 달러는 아무리 찍어내도 가치가 오르는 마법 같은 통화였다. 그 덕분에 미국은 돈을 찍어내 돈을 벌었다. 당국이 찍어낸 많은 돈이 금융회사와 기업에 유입되면서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에서 탈출했다. 정책의 성공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이 찍어낸 달러를 받아주면서 가치를 지탱해준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만약 각국이 달러의 여행을 금지했다면 달러값은 급락하고 미국은 아직도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도 그렇듯 달러도 여행을 한없이 할 수는 없다. 지난 10년간 세계를 여행했던 달러가 본격적인 귀환 시기를 맞았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여행 중인 달러에 대한 소집 명령이다. 세계 어느 곳에 있는 달러부터 귀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경제가 어렵거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에 있는 달러가 가장 먼저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만 있을 뿐이다. 달러의 귀환은 여타 외국인투자자들의 동요와 이탈을 불러 금융시장부터 시작해 경제를 마비시킨다. 선의로 달러를 불렀던 나라들은 달러가 돌아갈 때면 냉정한 현실 앞에 치를 떨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이 어려울 때 달러를 가장 많이 받아준 국가들이 더 큰 피해를 본다. 10년간 세계 각국을 대접받으며 여행하고 돌아갈 때 매정하게 뿌리치며 국가경제를 할퀴고 떠나는 것은 분명 특권을 가진 달러의 횡포다.

각국은 달러의 귀환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여념이 없다. 아르헨티나는 단기 기준금리를 연 60%까지 올렸다. 미국 기준금리가 연 1.75~2%인 것을 감안하면 30배나 높은 수준이다. 그래도 달러는 돌아가겠다고 짐을 싸고 있다. 브라질·터키는 물론이고 중국·인도까지 비상이 걸렸다. 1997년 달러의 귀환에 대비하지 못해 외환위기까지 겪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모든 나라가 달러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다.

달러의 귀환에 안전지대는 없다. 안일한 대응이 화를 부르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비하지 못한 나라는 국가부도와 같은 재난에 빠진다.
달러의 귀환이 일단락될 때까지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금리, 주가와 통화 가치가 급등·급락하는 불안정한 장세가 연출될 것이다. 무소불위 달러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일 관세폭탄을 투하하며 윽박지르는 보호무역보다 훨씬 무서운 게 달러다. 달러의 여행에 따른 파장은 세계경제가 얼마나 미국 중심적으로 굴러가는지, 그리고 이로 인한 글로벌 경제의 불균형이 얼마나 심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영우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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