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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 데스크

[매경데스크] 52시간 vs 150시간

  • 김주영 
  • 입력 : 2018.06.17 17: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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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대표인 한 지인이 모처럼 소주 한잔하자며 연락을 해왔다.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못해먹겠다"며 "최저임금제 때문에 제작 스태프 쓰기도 쉽지 않은데, 이제 근로시간까지 맞춰야 하니 이중·삼중고"라고 하소연했다.

"촬영 스케줄을 맞추다 보면 밤을 새우기 일쑤인데 근로시간까지 맞추는 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근로시간을 단축하려면 스태프를 늘려야 해 결국 인건비 부담이 증가하고 제작비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영세 제작사들은 결국 폐업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 뻔합니다." `근로시간 주 52시간` 도입이 코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산업 현장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중에서도 합법적으로 장시간 노동이 가능했던 방송·영화·광고 등 콘텐츠 관련 업종은 다음달부터 특례업종에서 제외돼 충격파가 더 크다.

모든 사업장이 주 68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없다. 1년의 유예기간 뒤에는 300인 이상 사업장은 주당 근로시간 52시간이 적용된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쪽대본에 밤샘 촬영`으로 요약되는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주 평균 노동시간은 130~150시간에 달한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주일에 70분짜리 드라마 2회분을 만드는 드라마 제작 종사자 10명 중 6명이 하루 20시간 이상 일한다.

이 같은 살인적 노동강도로 제작인력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현장 사고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근로기준법 개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근로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업무생산성을 강화해 삶의 질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법 개정의 취지와 방향성은 맞는다.

하지만 디테일이 문제다. 현실의 주 150시간과 개정법상의 주 52시간 사이에는 크나큰 숫자적 차이 이상의 엄청난 사회적 괴리가 존재한다.

짧은 기간 내에 근로시간을 거의 3분의 1로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초래된 현장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업계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문제의 소지를 해소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법 시행에 대비해왔어야 했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 8일에야 문화체육관광부와 고용노동부 주최로 `콘텐츠 분야 노동시간 단축 대응 방안 토론회`를 열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견을 좁히겠다는 취지였지만 이견을 좁히기는커녕 정부의 안일한 대응에 대한 성토장이 됐다.

고용부가 뒤이어 지난 11일 부랴부랴 발표한 대책도 법 시행 20일 전에 내놓은 가이드라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술해 오히려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콘텐츠 업계는 프리랜서 계약직 비중이 높기 때문에 이들을 상시근로자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주 52시간 근무 시행 시기, 적용 대상이 달라지게 되는데, 현재까지도 정부는 마땅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용부는 사용자와 노동자에게 공을 넘겼다. `가이드라인을 다양한 사업장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지나치게 구체적일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에 노사가 합의를 통해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원전, 대학입시 개편 등 국정운영의 중요한 잣대가 될 만한 사안마다 공론화위원회에 결정을 넘긴 후 일선 현장의 혼란만 가중시킨 전례가 데자뷔처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주 52시간 근무시간`이 제대로 정착되려면 현장에 대한 이해와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

그래야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부담이 제작 현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협력업체나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지 않을 수 있다.

그동안 업종 특수성 때문에 위법한 제작 관행을 당연시했지만, 이번 개정안 시행을 통해 제작 환경 개선은 물론이고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소득 감소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탄력근무제 등 다각도의 대책이 병행돼야 한다.


동시에 근로시간 제한을 일률적으로 적용함으로 인해 한류의 첨병인 게임·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력이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현장의 다양한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절실하다. 그래야만 최저임금제 인상으로 저임금 노동자는 오히려 일자리를 잃고 귀족노조만 혜택을 받는 `정책의 배신`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김주영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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