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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 데스크

[매경데스크] 냉혹한 현실의 벽과 희망고문

  • 박봉권 
  • 입력 : 2018.05.31 17:21:13   수정 :2018.05.31 19: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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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될 뻔한 미·북정상회담 불씨가 되살아났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북은 한 달여 만에 또 만났다. 북이 요청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4·27 판문점선언이 무색하게 생트집을 잡아 남북고위급회담을 일방 취소하는 등 어깃장을 놓은 게 바로 얼마 전이다. 북의 갑질에 노심초사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트럼프의 충격요법이 판을 확 뒤집어놨기 때문이다. 북이 트럼프를 상대로 우리에게 함부로 하듯 원색적인 비난과 거친 언사로 생떼를 부렸지만 회담 취소 통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어거지가 안 통하자 화들짝 놀란 북은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대화를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김정은이 운전대를 과도하게 꺾다 사고를 친 셈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 후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다고 했다. 하지만 북은 여전히 핵군축 변죽을 울리고 있다. 완벽하게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북의 비핵화와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 실체가 완전 딴판일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북이 모든 핵무기를 폐기할 걸로 보는 안보 전문가는 극소수다.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 김씨 왕조가 핵이라는 비대칭 대량살상무기 하나에 정권의 존망을 걸고 있는 현실에서 핵 포기라는 선택지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 정권은 비핵화 카드로 지난 25년간 상습적으로 우리를 그리고 세계를 기망해왔다. 툭하면 서울 불바다를 위협하고 한반도를 전쟁 공포로 몰아넣어온 게 북 정권 본질이자 실체다. 북의 모호한 비핵화 약속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건 비현실적인 위시풀싱킹(wishful thinking)일 뿐이다. 기대를 과도하게 높여 허상을 심어주고 비핵화 희망고문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검증하고 또 검증해야 CVID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체제보장은 잔혹한 북 정권의 인권유린과 독재에 면죄부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엄청난 선물을 주면서도 핵 대신 ICBM 폐기 정도에 그치는 어정쩡한 평화공존은 핵노예화 첩경이다.

이상과 희망사항 그리고 현실 간 심각한 괴리는 탈원전, 경제정책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부의 탈원전 궤변은 팩트 앞에 무너졌고 탈원전 추진 동력은 이미 상당 부분 상실됐다. 그런데도 "원전은 위험하기 때문에 폐기하는 게 옳다"는 식의 현실감각을 상실한 편협성 탓에 시나브로 원전산업 경쟁력은 추락 위기에 있다. 최근 어려움에 직면한 바이오 산업을 미래 산업으로 키우려면 각종 제도·정책을 현실에 맞춰 전면 리셋해야 한다는 외침도 크다. 장기간 연구개발(R&D)에 큰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바이오 산업은 제조업과 달리 매출·이익을 내는 데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장 선도자(퍼스트무버)가 되도록 지원한다며 기술특례상장을 시켜준 뒤엔 이 같은 특성은 감안하지 않은 채 제조업과 동일한 잣대로 재단하려는 제조업 마인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영업이익 4년 적자면 관리종목으로 편입되기 때문에 바이오 업체들이 R&D 비용을 과다하게 자산으로 잡는 유혹에 쉽게 빠졌고 고무줄 회계처리 논란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신제품 출시를 앞당겨준다는 신의료기술평가는 급변하는 현장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해 최악의 이중규제라는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취약계층 배려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며 밀어붙인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 교조적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은 되레 저소득층 소득과 일자리를 쪼그라뜨려 양극화 확대·고용쇼크를 초래했다. 부질없는 기대와 이상에서 출발한 소득주도성장은 현실의 벽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이런데도 청와대 경제팀은 정책 탓이 아니라 고령화 등 구조적 요인 때문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해석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벽창호 정부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정책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국민 혈세를 쏟아부어 땜질하는 건 분식회계나 다름 아니다. 방향이 맞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가 커지면 필패다. 방향을 돌리라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맞게 근무시간은 줄이되 유연한 탄력근무제는 확대하고 최저임금을 올리되 속도를 조절하는 식으로 유연해지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봉권 과학기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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