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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매경 데스크

[매경데스크]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업들

  • 박정철 
  • 입력 : 2018.05.27 17: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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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밑져라."

재령 이씨 영해파 운악종가의 17대 종손인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의 가훈이다. 이 전 회장은 어릴 적부터 "남에게 밑져도 잘해주라"는 말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남과 함께 일할 때 남을 이기려 하지 말고, 다소 해를 끼친 사람에게도 잘해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베푼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얻음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가르침이다.
`인화의 경영자`였던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별세하자 많은 사람들이 애도한 것도 고인이 이타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을 비서 없이 혼자 조문하고 공식행사든 사적 약속이든 늘 20~30분 먼저 도착해 상대를 기다리는가 하면,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고인의 온화하고 소탈한 성품은 국민에게 적잖은 감동을 줬다. "남들에게 베풀고 살라"는 어머니 뜻에 따라 사회공헌활동에 몸소 앞장선 것도 울림을 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의 귀감인 셈이다.

하지만 한진 일가의 갑질과 폭행 파문에서 드러나듯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재벌가와 오너 경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하다. 황제 경영과 경영권 편법 승계, 권력과의 유착, 협력업체 단가 후려치기 등 일부 기업의 비뚤어진 불법·탈법이 재계 전체의 문제인 양 부풀려지면서 반기업정서가 팽배해 있다. 투철한 기업가정신으로 `변방의 나라`를 세계 10대 강국으로 도약시킨 창업 1세들의 도전과 창의, 열정 등 긍정적 이미지는 오간 데 없고 특권과 탐욕의 대명사로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됐다.

더구나 문재인정부가 `재벌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하면서 검찰·경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 모든 사정기관들이 기업 비리를 캐느라 혈안이다. 새 정부 출범 1년 만에 삼성·LG·SK·롯데는 물론 한진·효성·부영·포스코·대우·GS건설 등 대부분 그룹이 조사 대상에 포함돼 수난을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00년대 초 미국 정부가 여론을 등에 업고 담합과 독과점 횡포 등을 일삼던 재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것과 유사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최저임금 인상 등 국내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보다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끝을 피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한 변호사는 이에 대해 "수사 정보가 살아 있는 권력보다 정권의 끈이 떨어지고 약한 자들 위주로 몰리긴 하지만 지금처럼 기업을 때려잡으려고 사정당국이 총동원된 적은 드물다"고 지적한다.

사법부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이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다. 한 판사는 "대법원장이 바뀐 데다 적폐 연루 기업인은 모조리 엄벌하라는 여론이 비등하면서 판사들이 부담을 느낀다"며 "합리적 판단과 균형감을 갖고 기업인들 죄를 가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청와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재판장을 파면하라`는 국민청원을 사법부에 전달해 압박한 것도 이런 법원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주변이 온통 가시밭길이다 보니 기업인들로선 "세금 낮춰주고 땅도 줄 테니 공장을 지어달라"는 해외의 러브콜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 기업인은 "이제 국내 공장을 다 거두고 해외로 옮기고 싶다. 내가 왜 온갖 법률과 규제로 옥죄는 나라에서 `리걸 리스크(legal risk)`까지 지면서 사업을 해야 하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기업가도 법을 어기면 죗값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재벌개혁을 이유로 망신 주기식, 먼지 털이식 조사를 하는 것은 환자를 살린다면서 환부가 아닌 온몸에 메스를 들이대 병을 더 악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개인 치부를 위한 탈세나 횡령, 재산 해외 도피 등 중범죄는 엄벌해야 하지만 정권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잘못이나 경영 과정상 빚어진 과실은 선처해줄 필요가 있다. 한 법조인은 "기업가정신이 위축되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가로막혀 피해는 국민에게 갈 것"이라며 "업무상 배임 같은 죄는 법원이 엄격한 잣대로 걸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동안 `군림`과 `지배`에 익숙하던 기업인들도 시대 변화에 맞게 국민과 같이 호흡하면서 시스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준법경영을 강화하고, 중소기업·소상공인과의 상생 협력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전 능력과 자질을 철저히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다.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면 로버트 라이시 미국 UC버클리대 교수의 말처럼 부의 창출과 관계가 없는 미래 세대에게 부를 물려주지 말고 공공 영역으로 되돌리는 게 낫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인 제시카 트레이시는 "오만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고 무례하며 심지어는 호전적"이라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분야에서 높은 지위의 대가가 되겠느냐"고 했다. 이제는 자만보다 겸손을, 탐욕보다 베풂을, 오너 일가보다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기업인이 많아져야 한진 갑질에 따른 공분이 잦아들고 반기업 정서도 해소될 수 있다.

[박정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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