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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1997년과 2008년 가을의 기억

  • 정혁훈 
  • 입력 : 2018.10.30 00:07:01   수정 :2018.10.30 15: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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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반도체를 맡고 있었다. 반도체는 당시 재계의 효자 사업이었다.

삼성과 현대, LG 등 반도체 3사가 모두 미국과 영국 등 해외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앞다퉈 나설 정도였다.
그러나 위기 발생 직전, 핵심 제품이던 16메가 D램 가격이 개당 50달러대에서 3달러대로 급전직하로 추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보철강에 이어 삼미, 기아차, 쌍방울, 해태 같은 대기업이 줄줄이 쓰러진 데 이어 반도체 가격마저 폭락한 것이 위기의 징조였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쥐고 있던 정부도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한 채 보고 싶은 것에만 눈길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국민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는 그 진원지인 미국에 있었다. 1년간 연수를 위해 2008년 늦여름 미국 동부에 도착한 얼마 뒤부터 현지 한국인들로부터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원·달러 환율이 1000원대에서 1100원대로 올라섰는데, 언제쯤이면 다시 1000원대로 떨어질 것 같으냐는 것이었다. 달러를 한국에서 송금받는 입장에서는 환전 시기에 따라 손익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이공계 전공이던 그들의 눈에 경제신문 기자가 꽤 전문가로 비쳤던 모양이다.

알고 지내던 외환 전문가들 몇 명에게 급히 의견을 구한 뒤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환율이 일시적으로 오버슈팅한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1000원대 초반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원·달러 환율은 그날 이후 이듬해 초까지 1500원대로 줄곧 내달렸다. 연수비를 원화로 지급받았던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에게 환전은 곧 고통이 됐다. 한미 통화스왑의 극적 체결이 없었다면 아마도 고통의 시간이 훨씬 연장됐을 것이다.

위기는 예고 없이 다가온다. 경고의 목소리가 없지 않지만 대개 소수 의견에 그친다. 그보다는 안도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린다. `경고`가 `안도`에 묻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득권층에겐 태생적으로 위기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치는 그 순간까지 "위기는 없다"고 외치는 것이 바로 기득권층이다. 위기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폭발력이 있다. 기득권을 오래도록 누리려면 `판`이 깨져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기득권 최상층에는 권력이 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위기론을 싫어하는 이유다.

문제는 위기가 닥쳤을 때 더 큰 피해를 보는 쪽은 정작 기득권층이 아니라 취약계층이라는 사실이다. 기득권층은 대개 위기에도 버틸 수 있는 수단을 다양하게 갖고 있다. 그에 비해 취약계층은 위기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피멍이 든다. 거리로 내몰린 `한계` 직장인들이 그랬고, 셔터를 내려야 했던 영세 자영업자들이 그랬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근로자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권력은 "위기는 턱도 없다"는 투로 행동한다. 그러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시나브로 커지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해외로 돈을 빼내 가기 시작했고, 성장률 전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낮춰지고 있다. 빚더미에 올라 있는 가계는 이자 쓰나미를 예상하면서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할 정도로 취약하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들어서기 직전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꺼림직하다. 우리나라도 지난해를 정점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미·중 무역전쟁과 이탈리아의 유럽연합(EU) 탈퇴 움직임도 그 끝을 예상할 수 없어 불안하다.
위기가 잉태된다고 하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낙관론을 경계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낙관이야말로 시야를 흐리는 최대의 적이다.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만 대비책도 나온다. 그래야 위기가 닥쳐도 덜 당황하게 된다.

[정혁훈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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