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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의 창] 김소월의 영변과 핵시설의 영변

  • 입력 : 2018.10.12 0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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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순서 매기기를 좋아합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곡 100선` `한국인이 좋아하는 위인 100명` 그리고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와 같은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하지요.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거의 매번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시 중에서 부동의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시에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라는 우리들 귀에 너무도 익숙한 구절이 나오는데, 소월이 1925년에 발간한 시집에 수록된 시라고 하니, 아마도 지금부터 100년 전쯤 영변에는 진달래꽃이 아주 많이 피었나 봅니다.

오늘날 `영변(寧邊)`에서 소월의 시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냉전 종식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 영변은 북한 핵을 상징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북한의 영변은 한마디로 거대한 원자력연구단지입니다. 이곳에는 우라늄농축공장, 핵연료재처리공장, 폭발실험장, 그리고 북한이 주장하는 100메가와트 경수로 등이 밀집해 있습니다. 1962년 최초 조성된 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과학기술능력, 무엇보다도 한반도를 수차례에 걸쳐 전쟁의 위기까지 몰고 갔던 핵무기능력의 상징인 셈입니다. 북한은 미국의 시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교수를 두 번이나 영변으로 초청하여 자신들의 핵능력으로 미국을 지속적으로 자극한 바 있습니다. 북·미 담판의 날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려 온 것이지요. 헤커 박사는 미국의 3대 핵무기 연구소 중의 하나인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10년 넘게 재직한 세계 최고 전문가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9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헤커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습니다.

`조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연히 미국으로부터의 신뢰와 체제 안정을 둘러싼 약속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에 따라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현시점에서 `종전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입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정부와 북한은 연내에 종전선언을 하겠다고 4·27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바 있고, 남북한 두 지도자의 의지도 강해 보입니다. 종전선언 추진을 위한 북한의 상응조치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은 현재 핵능력의 공개라는 차원에서 소위 `핵 리스트` 제출을 줄곧 요구해 왔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북한의 거부감은 완강한 편인데, 북한 체제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를 담판 국면 첫 단계에서부터 모두 꺼내 보일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아직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영변 핵시설 폐기 가능성`이 종전선언과 교환되는 듯한 분위기가 조금씩 조성되고 있습니다. 영변이 평화체제를 위한 본격적인 진입의 관문이 되려는 순간인 것이지요. 만약 이렇게 되면 북한의 노력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동창리 엔진시험장 폐기 약속` `영변 핵시설 폐기 가능성 언급`, 이런 시퀀스를 밟게 되는 셈입니다. 소월의 진달래꽃이 있던 영변은 `핵 리스트`보다 듣기에도 훨씬 좋습니다. 평화체제의 관문이 시적(詩的)인 미(美)로 대체되었으니, 그 이후의 프로세스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기만을 빌어봅니다.

모든 사람은 변합니다. 동시에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진리 때문에 속상해하고 또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북한과 북한의 지도자도 변할 때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아직은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2018년 한반도의 시계는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종전선언, 2차 북·미정상회담,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의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소월의 시로 남아 있는 영변의 시적 상상력이 핵을 넘어 우리 민족의 꿈과 희망 속에서 다시 되살아나기를 희망해 봅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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